나는 목수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목(小木) 장인, 엘레강스 최
나는 목수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목(小木) 장인, 엘레강스 최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1.12 09: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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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짓겠다'는 꿈으로 목수일 시작
가족 위해 대목에서 소목으로 변경
교육과 일 병행 '내 기술 공유하고파'
직업에프라이드가져야좋은작품나와

지금은 진주시 금산면에 살지만 엘레강스 최의 고향은 경기도 화성이다. 경희대학교를 나왔고 자동차 대기업에서 2년을 일했다. 엘레강스 최라는 이름은 군 제대 직후 교환학생으로 갔던 프랑스 그르노블 유학 시절 현지 친구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프랑스 유학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 영어는 어느 정도 됐지만 프랑스에서 영어는 쉬 통하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음에도 영어라는 언어 자체가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생겼다고 믿는,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영어를 알아들어도 못 알아듣는 척 한다. 안 되겠다 생각한 엘레강스 최는 중고시장에 가서 TV 한 대를 샀다. 그리고 들리던 들리지 않던 뉴스 프로그램을 하루 종일 틀어놓았다. 6개월이 지나 귀가 트고 말도 어느 정도 됐다. 젊었던 시절. 그는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3국(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사하라 사막엘 가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6개월을 여행했다. 옆으로 바다가 보이고 아랍계 현지인들은 인성도 좋았다. 물론 그들 뇌리에 동양인이란 이소룡과 성룡 밖에 입력돼있지 않았지만. 높을 줄로만 알았던 대사관의 벽도 김치와 양갈비를 함께 먹으며 눈 녹듯 허물어졌다. 고위공직자 부부가 엘레강스 최에겐 그저 고향의 할머니, 할아버지 같았다. 그렇게 유학생활을 마치고 엘레강스 최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엔 강렬한 꿈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엘레강스 최가 제작한 5미터 길이 블랙 월넛 테이블. 사진=김성대 기자.
경남 창원시 성산구 불모산로에 있는 '설레움55' 조선진 대표와 함께. 조 대표는 저 블랙 월넛의 주인이기도 하다. 사진=김성대 기자.
5미터 길이 블랙 월넛. 길이며 질감에서 흔치 않은 나무다. 사진=김성대 기자.

집을 짓겠다는 꿈

“남성들은 보통 짓고(Build) 조립(Structure)하는 거에 관심이 많잖아요. 저도 다니던 회사를 나와 ‘남자들의 로망’인 집을 지어보겠다는 허황된 꿈을 꿨습니다(웃음). 사실 윗동네(수도권) 경우는 거의가 샐러리맨이어서 남자가 백주대낮에 슬리퍼 차림으로 다니면 눈총 받기 딱 좋습니다. 백수라는 얘기거든요(웃음). 이곳이야 사업, 자영업 하시는 분들이 많으니 상대적으로 덜하지만요. 여튼 퇴사 후 더는 놀 수가 없었습니다. 검색을 하기 시작했죠. 건축도 분야가 많아서 하나를 정해야 했는데, 그래도 기왕 집을 짓겠다 마음먹었으면 전통 한옥을 지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폭풍 검색을 했습니다. 그러다 한 블로그에서 ‘한옥 학교를 가지 말고 그 비용과 시간으로 연장을 사서 현장으로 바로 와라’는 얘길 보고 곧바로 유명한 대목(大木-큰 건물을 잘 짓는 목수,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거나 물건을 만드는 사람-편집자주) 분 아래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죠.”

당시 엘레강스 최는 목수 일에 문외한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폐쇄적인 목수 사회는 아예 그를 투명인간 취급 해버린다. ‘쟤 대학 나왔어, 우리 식구 아니야.’ 월급도 얼마 안 되고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견디기가 힘들어 그는 목수 일을 배우기 시작한 첫날부터 고민을 하게 된다. ‘이 일을 계속 해야 할까.’

“딱히 기술도 없고 그때 전 옆에서 보조만 하는 역할이었어요. 나무 들어주고 나무 돌려주는 일을 했죠. 처음에 사수가 3일을 버텨보라고 했습니다. 결국 3일은 3주가 됐고 3개월이 되더니 급기야 3년을 버텼습니다. 저 녀석 집에 갈 줄 알았는데 버티는 거죠(웃음). 3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나, 사수가 ‘너 저거 한 번 깎아봐라’며 말을 걸어주더군요. 목수 일을 하게 된 겁니다. 그걸 제대로 깎으면 전 그 일을 계속 하게 되는 거였죠. 만약 그 일을 못해내면 다시 보조공으로 내려가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깎았죠. 깎으니까 일당이 2만원 올랐습니다(웃음). 그렇게 시작한 것이 8년이 지났고, 저도 어느새 목수 중에서 윗등급이 됩니다. 대목은 아무래도 절 공사를 많이 해서 강원도, 지리산 악양 등지를 주로 다녔어요. 그러다 산청 단성면 사월이라는 마을에 집을 짓게 됐는데 이게 공사 기간이 3년이 잡힌 거죠. 보통은 6개월 정도면 다 짓는데. 전 그때까지 진주가 어딘지 몰랐어요. 수도권 사람들은 통영이나 거제를 많이 알지, 진주와 사천은 잘 모르거든요. 전 사천이 중국 운남성의 사천인 줄 알았습니다(웃음). 사천 옆이 삼천포인 줄도 당연히 몰랐구요. 어쨌든 그때가 30대 중반, 젊었으니까 그냥 산청에서 가까운 진주 인사동에 전셋집 얻어 혼자 살았어요. 20분이면 오갈 수 있는 거리니까 출퇴근을 했죠. 목수들은 보통 25일을 일하고 5일을 한꺼번에 쉬는데요, 그 5일 동안 저는 영화도 보고 커피숍에서 책도 보며 유유자적 생활을 했습니다.”

산청군 단성면 목면시배유지 뒤 사월리라는 마을에 엘레강스 최가 남긴 한옥.

진주에서 통영, 거제가 가깝다는 얘길 들은 엘레강스 최는 여름 5일 동안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거제의 한 횡단보도에서 그는 한 여인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는데 바로 지금의 아내다. 이후 연애는 목수일과 병행됐고 그는 일을 마친 뒤 산청-거제-진주를 오가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진 결혼, 물론 아이도 생겼다. 하지만 건축 일은 전국을 다니며 해야 하는 일. 엘레강스 최는 또 한 번 선택을 해야 했다.

“마침 다음 공사 지역이 수원이었어요. 홀몸이 아닌 아내를 두고 떠나야 하는 일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죠. 더는 가족을 두고 돌아다니는 생활은 할 수 없을 것 같아 미련 없이 대목 일을 그만 뒀습니다. 큰아이가 태어나고 3개월쯤 지났나, 저에게 우울증이 왔어요. 활동적인 일을 하다가 아이만 바라보며 먹이고, 젖병 삶고, 빨래하고 이러면서 우울증이 온 거죠(웃음). 그래서 아내가 퇴근한 뒤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 입시 학원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학원 일을 하면서 다시 나무를 만지고 싶어졌죠. 이번엔 대목이 아닌 가구를 제작하는 소목 공방에 등록을 했습니다. 운 좋게 몇 년 동안 수련을 할 수 있었고, 오전 일찍 가서 가구를 만들고 오후 4시가 되면 학원으로 출근하는 생활을 이어갔어요. 그러다 또 한 번 고민에 빠지는데 수입은 학원이 더 많았지만 나와 매치가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거죠. 내가 좋아하는 일, 퇴직 후에 할 수 있는 일은 목공 일이다, 이 일을 해야 삶이 행복할 것 같았어요. 돈을 많이 번다고 행복할 것 같지는 않았죠. 결국 소목이 되기로 결정한 겁니다.”

교육과 일을 병행하다

엘레강스 최는 직접 목공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목공을 가르치기도 한다. 스스로 터득해야 했던 대목의 세계에서 서러웠던 그는 ‘내 기술을 가르쳐주면 밥그릇을 빼앗긴다’는 좁은 생각을 경계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어렵게 배운 기술을 타인들과 공유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유료냐 무료냐는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의 장소가 제주냐, 서울이냐도 그곳에 진심으로 배우려는 사람들만 있다면 엘레강스 최에겐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예전엔 서울까지 자동차로 움직였는데 졸음운전 때문에 대중교통을 타기 시작했죠. 금산 집에서 새벽 4시에 나와 고속버스터미널까지 택시 타고 가면 4시40분, 버스에서 3시간30분 정도 잠을 자고 8시50분에 서울에 도착합니다. 17시간 교육을 마치고 터미널에 도착하면 밤 12시10분. 막차를 타고 다시 진주로 오는 겁니다. 전 교육할 때 최선을 다합니다. 사람이 100살까지 산다고 했을 때 그 자리에 오신 분들은 36,500일 중 하루를 저에게 투자한 거거든요. 어떤 분은 가벼운 DIY 목공 수업인 줄 알고 갔는데 대학원 수준의 수업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어요(웃음). 아침부터 점심 전까지 이론 수업을 하고 점심 후엔 수강생 분들이 반드시 실습해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자신의 연장을 만들어보는 시간이죠. 남이 하는 걸 영상이나 매체를 통해 보는 것과 실제 해보는 건 굉장히 큰 차이가 있어요. 제 수업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은 유튜브를 보고도 따라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강생들과 함께. 강의를 할 때 '엘레강스 최'는 '매드맥스 최'가 된다. 그만큼 꼼꼼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얘기다.

가입 회원만 27만 명이 넘는 ‘우드워커’라는 카페가 있다. ‘엘레강스 최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도는, 나무와 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그는 그곳에 자신의 교육 공지를 올리곤 하는데 한 번은 자정에 올렸다가 서버가 다운 된 적도 있다. 10명을 모집했는데 3분 사이에 27명이 신청한 것이다. 대기 인원만 40여 명. 그의 강의는 늘 인기 폭발이다. 근래엔 경기도 가평에서 30명과 1박2일 무료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그에게 교육받은 사람만 300명이 넘는다. 이 수강생들은 단체 톡방으로 지금도 엘레강스 최와 소통하고 있다. 공무원, 경찰, 대학 총장 등 직업군도 다양해 엘레강스 최의 인맥도 계속 넓어지는 중이다.

교육할 때만큼은 ‘엘레강스’ 아닌 ‘매드맥스’

그의 교육은 깐깐하고 꼼꼼하다. 혹자는 엘레강스 최의 교육을 ‘전투적’이라고 말한다. 스스로도 교육 때만큼은 자신은 ‘엘레강스’가 아닌 ‘매드맥스’라고 얘기할 정도다. 예컨대 그가 대패를 논할 때 수강생들은 전 세계 대패의 비교·분석은 물론 해당 대패를 어느 대장간 어느 장인이 만들었는지, 대패의 원리는 무엇인지, 대패의 각도 이론은 어떤 것인지를 공부할 각오를 해야 한다. 여기에 숫돌의 거칠기와 밀도, 접착제 성분 등 엘레강스 최의 수업에선 목공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다 배운다고 보면 된다.

“강의 전 해외 문헌들과 목공 관련 잡지 등을 통해 저부터 이론을 마스터해서 오신 분들에게 전달합니다. 인간문화재나 명장들이 많이 알고 잘 하긴 하지만 가르치는 일은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해요. 전 아무래도 가르치는 것에 특화돼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교육을 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전문가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하면서 비로소 완성 된다’는 겁니다. 전 목수 사회에 있었던 ‘남에게 가르쳐주면 안 된다’는 폐습 대신 내가 개발·창조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남들에게 더 많이 가르치고 공유해야 한다는 주의예요. 그래서 제 강의에선 녹음, 메모는 물론 동영상 촬영도 모두 허용하고 있습니다. 큰 틀을 보고 가르치는 거죠. 저에게 배워 가시는 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전파를 해줬으면 좋겠어요.”

엘레강스 최가 수강생들에게 요구하는 건 딱 하나다. 바로 예습·복습이다. 가령 일주일 뒤 수업이 있다고 하면 그는 PDF 예습자료를 수강생들 카톡으로 보낸다. 그리고 수업 후엔 집으로 돌아가는 수강생들 카톡으로 다시 복습자료를 보내준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교육 내용을 잊어버리게 마련이기 때문에 고안해낸 그만의 교육 방법이다. 물론 숙제도 있다. 자신이 떠난 뒤 오늘 배운 걸 토대로 나만의 새로운 대패를 제작해 카톡으로 보내라는 내용이다. 이처럼 꼼꼼한 탓에 그는 교육 한 번 하고나면 3일 동안 진이 빠져 일에 집중을 못한다. 갔다 오면 링거를 맞을 정도다. 엘레강스 최는 무료 교육에 자신의 일주일을 투자한다.

작업 중인 엘레강스 최. 그는 철저하게 수공구를 고집한다. '제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다.

무조건 수공구 사용, 현행법 ‘원목가구’ 기준 아쉬워

꼼꼼함은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철저히 주문 제작을 한다. 구매자가 나무를 직접 보게 하고 나무가 가진 스토리를 설명해주며, 기능성 마감과 테이블 다리에 관해 세세한 이야기를 나눈다. 뜻만 맞으면 할인 가능성도 언제든 열려 있다. 제작은 구매자의 최종 결정 후 이뤄진다. 무조건 수공구를 쓰며, 칠하고 말리고 갈아내는 도장 작업에만 일주일을 오롯이 투자한다. 전기 공구들로 하면 하루에 끝낼 수 있는 일이지만 “대충 만드는 게 더 힘들다”는 그에게 얼렁뚱땅은 체질상 맞지 않는 습관이다.

“한 달에 2, 3개 밖에 못 만들어요. 가격대는 생각보다 비싸진 않아서 월넛(Walnut)으로 봤을 때 200만 원대로 보시면 됩니다. 보통 일반 가구점에서 ‘100% 원목’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현행법에선 원목을 10%만 사용해도 ‘원목가구’라고 홍보할 수 있다는 맹점이 있거든요. 다리만 원목을 써도 원목가구라 부를 수 있는 거죠. 원목이라 함은 친환경, 자연, 건강하다는 이미지인데 막상 샀더니 아이들 아토피가 심해지는 겁니다. 예컨대 MDF의 경우 폐목재를 미세하게 분쇄해서 접착제와 이겨 고온고압으로 압착해 필름을 입힌 것이거든요. 소비자들이 모르고 사는 거죠. 한마디로 원목가구가 아닌 것을 원목가구라고 얘길 하는 건데, 좀 아쉬운 부분입니다.”

수공구를 고집하다 보니 엘레강스 최는 만성질환을 달고 산다. 어깨, 무릎도 안 좋고 손목에는 터널증후군이, 손가락엔 트리거증후군이 박여 있다. 하지만 자신의 가구를 선택한 구매자가 만족하는 모습에 그런 질환들 쯤은 씻은 듯이 사라진다. 그는 자신의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어느 공방에 가더라도 ‘우리 아빠가 엘레강스 최예요’ 했을 때 알아봐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엘레강스 최가 전통기법 중 낙동법(烙桐法)으로 제작한 오동나무 차탁.

남보다 앞서고 싶다면 그 분야에 미쳐야

“저는 지나가는 걸인에게도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인 분들에겐 자기만의 연륜이 있을 테구요. 항상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로 사는 게 옳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항상 곁에 두고 보는 책이 있는데 일본 역사소설 <대망>입니다. 대망을 읽은 사람은 <삼국지>가 시시하다고들 말하죠. 이 작품은 정치인, 경영학도, 기업경영인들의 필독서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엔 아들 녀석이 설명을 해달라고 하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있는데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더군요(웃음).”

엘레강스 최는 남보다 앞서고 싶다면 한 분야에 미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 분야에 올인을 하고 그 생각만 24시간을 해야 한다는 거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최소 7, 8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절박하게 노력한다면 베테랑이 되는 시간을 더 앞당길 수는 있다. 단, 마지막에 남는 건 결국 대인관계인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작은 이익을 취하기보다 사람들과 두루두루, 후세에 뭔가를 물려주기 위해 살다보면 ‘저 사람 열심히 살았구나’ ‘인생 살 만 했다’ 서로가 인정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다. 끝으로 목공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엘레강스 최에게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흔히 목수는 ‘노가다’로 폄훼되곤 합니다. 크리에이터, 예술가라 불리지 않죠. 저는 수강생들에게 늘 얘기합니다. 제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라고. 대량 생산으로 찍어내는 익명의, 누구에게 갈지 모르는 제품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단 한 사람을 위한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임하면 가구의 퀄리티가 달라진다고요. 가끔 사람들에게 하시는 일이 무언지 물어봅니다. 대부분 가구를 제작·디자인 한다, 공방 운영을 한다고 대답하죠. “저는 목수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봤어요. 직업에 대한 프라이드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데 좋은 작품이 나올 리가 없죠. 제품을 만드는 것과 작품을 만드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김성대 기자

 

★엘레강스 최가 알려주는 원목가구 상처 치료법!

원목가구에 상처가 나서(가장 위) 물티슈로 닦아주니(가운데)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가장 아래).

원목가구를 사용하다 보면 이리저리 부딪혀 상처가 날 수 있습니다. 나무는 기본적으로 섬유질(셀룰로오스)로 이뤄져 있는데요, 가구에 난 상처는 조직적으로 봤을 때 그 섬유질이 눌려 생기는 것입니다. 자동차 경우엔 덴트로 들어간 부분을 쉽게 펼 수 있지만, 눌린 나무를 편다는 건 사실 생각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 팁! 간단합니다. 눌린 나무 부분에 물을 발라주면 됩니다. 그러면 나무 조직 안에 물이 스며들어 기화 현상을 일으키면서 찌그러진 부분이 부풀어 올라 복원됩니다. 더 빨리 나무를 복원시키고픈 분들은 해당 부분을 물티슈나 물걸레로 문질러주셔도 나무는 완벽하게 원 상태로 돌아옵니다. 100퍼.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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