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신뢰로 사는 사나이 '엑스포 광고 · 원전기' 원봉수 대표
원칙과 신뢰로 사는 사나이 '엑스포 광고 · 원전기' 원봉수 대표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8.12.26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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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걸 추구했던 어린 시절
우여곡절삶‘원칙과의지’로버텨
고향 산청에서 했다 하면 ‘1등’
성공해 옛 살던 집 되찾고싶어

엑스포광고와 원전기를 함께 운영하는 원봉수 대표는 어린 시절 언제나 활동적이었다. 산청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생초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학생은 학생 본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늘 정확한 걸 추구했다고 한다. 원 대표는 못 사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고, 남이 하는 일은 그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태껏 살아왔다. 그것이 천성이라 그는 믿고 있다. 물론 부친도 그랬다.

 

원봉수 대표는 서울에서 신발 사업으로 제조업의 정점까지 올랐다가 공장 화재와 외환위기를 겪고 다시 산청으로 내려왔다. 고향에 와서 그는 무슨 일을 하든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

집안사고로 맞은 첫 번째 위기

원 대표는 3남매 중 장남이다. 집안 형편은 줄곧 괜찮은 편이었는데 고등학생 때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부친이 6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하다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때 집 재산을 모두 써버렸다.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 대학 갈 형편이 못 돼 진학을 포기한 원 대표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선택했다. 일단 결심을 했으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원 대표의 또 다른 천성이다. 그는 무작정 서울로 갔다. 남에게 도움 받기보다 도움 주는 걸 좋아하는 것까지 부친을 쏙 빼닮은 원 대표는 친인척에게 기대지 않고 직업을 스스로 찾아 나섰다.

“첫 상경 때 뭘 알았겠습니까. 무작정 용산에 있는 직업소개소를 찾아갔죠. 가서 힘들어도 좋으니 돈을 가장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뭐냐고 물었어요. 당시엔 신발 계통 가내 공업 쪽으로 사람을 많이 구하던 땐데, 거기서 저를 달동네로 데리고 가더군요. 그렇게 겨울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방에서 기술을 익혔고, 60,000원 정도 되는 월급으로 동생들 학비, 생활비를 지원했습니다.”

원 대표는 군대를 면제 받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나라가 베푼 혜택이었다. 그런데 집에서 큰 사고가 나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비행기로 진주로 가는 방법으로 법원을 1년 동안 쫓아다녀야 했다. 그러면서 전세 보증금까지 다 써버렸다. 보증금만큼은 안 된다던 아내. 결국 “100만 원으로 다시 시작하자”며 아내를 설득했고, 아내도 끝내 수긍해주었다. 24살 때 결혼해 서른 살도 되지 않았던 때 원 대표는 부친의 작고 이후 두 번째 큰일을 그렇게 이겨냈다.

 

원봉수 대표 가족 사진. 원 대표는 24살 때 결혼해 아내와 함께 온갖 역경을 이겨냈다.

 

‘사장’이 되다

“91년 경 한 달에 150,000원 정도 벌었어요. 새벽 2시에 출근해 신발 꾸러미를 둘러메고 60미터 되는 계단을 20번씩 왔다 갔다 하며 용달차에 실어주는 일을 했죠. 정말이지 입에서 거품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걸 몇 년을 했어요. 아침 7시부터 밤 11~12시까지. 서울 달동네 집 한 채가 1,400만 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회사 직원은 30명 정도였다. 그리고 원 대표에게 첫 번째 기회가 왔다. 자신과 사고방식이 비슷한 당시 사장이 원 대표를 좋게 본 것이다. 회사는 자식이 아니라 일 잘 하는 사람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사장은 자재 주문 등 모든 일을 내 일처럼 꼼꼼하게 했던 원 대표에게 공장장 역할을 맡겼다. 경험은 짧지만 성실과 정직으로 일궈낸 쾌거였다.

“하루는 반 농담으로 ‘사장님 이 공장 그냥 저 주세요’ 했더니 사장님이 ‘어, 그래 너 해라’ 하시는 거예요.(웃음) 기회다 싶어 처가에서 돈을 조금 융통했죠. 나머지 돈은 1년 뒤에 벌어 갚겠다하고 공장을 내 걸로 만들었습니다. 여성 슬리퍼와 숙녀화를 주로 만들던 ‘멜본’이라는 브랜드였는데 당시 서울 청계천 동대문 시장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어요. 돈도 꽤 많이 벌었죠. 그때 하루 주문량만 1,500만 원이었으니까요.”

 

모든 걸 앗아갈 뻔한 공장 화재

하지만 기쁨도 잠시. 어느 날 공장에 불이 나고 만다. 도급제여서 밤 10~11시까지는 항상 직원들이 있었던 당시, 11시30분 경 퇴근하던 한 직원이 담배를 제대로 끄지 않았던 것이다. 1시간 이후 발화가 시작됐고 결국 화마는 회사를 삼켜버렸다. 한 밤 중에 전화를 받은 원 대표가 도착해보니 소방차만 7, 8대가 서 있었다. 청계천 거래처들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난리가 났다. 어음 반 현금 반 매주 수금을 하던 그 때 시장엔 평균 잔고가 1억8,000만 원 정도는 기본으로 깔려있었다. 그런데 불이 난 것이다. 이때, 원 대표 특유의 ‘긍정 마인드’가 고개를 들었다.

“손해 본 것 가지고 신세 한탄 해봐야 아무런 도움 안 됩니다. 불이 나고 곧바로 직원들에게 70~80평 되는 공장 부지를 알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다행히 봉일시장에 72평짜리 반지하 공간이 있어 가보고 됐다 싶어 바로 계약을 했죠. 그러곤 컨베이어 벨트부터 신발 제조 관련 기계들을 사러 비행기 타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같은 일 하는 업자들이 멜본에서 불났다는 소문을 듣고 술 사주며 위로해주더군요.”

원 대표는 일단 기계들을 큰 트럭에 실어 회사로 올려 보냈다. 김포 공항엔 다음날 아침 첫 비행기로 갔다. 그는 불이 나고 이틀 만에 공장에 기계들을 다 들여놨다. 3일 동안 물건이 못 나가 청계천에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나마 자재 주문을 불이 난 다음날 바로 해둔 덕에 물건은 4일째부터 시장에 풀 수 있었다. 사태 대응을 얼마나 빨리 했는지 거래처들은 공장에 불이 난 사실을 믿질 않았다. 원 대표는 그날에만 9,000만원 가까이를 수금했다. 화재 이야기에 거래처들이 잔금을 더해서 준 것이다.

 

원봉수 대표는 긍정과 원칙으로 삶을 무장해왔다. 그는 "손해 본 것 가지고 신세 한탄 해봐야 아무런 도움 안 된다"고 했다. 사진=김시원 기자.
원봉수 대표는 긍정과 원칙으로 삶을 무장해왔다. 그는 "손해 본 것 가지고 신세 한탄 해봐야 아무런 도움 안 된다"고 했다. 사진=김시원 기자.

 

또 한 번의 난관, IMF 외환위기

그러던 97년, 세상은 원 대표의 ‘긍정의 끈기’를 한 번 더 시험하려 한 건지 ‘국가 부도의 날’로 일컫는 IMF외환위기가 터진다. 원 대표의 거래처들은 줄줄이 도산했다. 유통과 도매상들은 부도가 나도 완전히 주저앉지 않아도 되는 안전망을 가지고 있지만 제조업은 달랐다. 제조업은 부도가 나면 그대로 주저앉게 돼 있다. 원 대표는 그때만 해도 신용이 최고라 생각하고 어음 회수를 액수에 비례해 하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었어요. 1,000만 원짜리 어음은 200만 원에 회수해도 되는 거였는데 1,000만 원짜리는 1,000만 원에, 2,000만 원짜리 어음은 2,000만 원에 회수를 했으니. 내가 무슨 ‘돈병철’도 아니고(웃음), 그 많은 어음을 어떻게 다 회수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2년을 버티다 결국엔 집까지 팔아 부도가 나고 말았어요. 12억 정도 되는 어음을 7년 정도 냉동실에 넣어뒀다가 산청 와서 폐기처분 시켰습니다.”

5년에 한 번씩 법원에 관련 신청을 하면 유지가 되는 어음이었지만 원 대표는 자신의 운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이는 지나간 일, 손해 본 일에 대해선 어떤 후회도 원망도 않는 원 대표가 미련을 버리고 다시 일어서기 위한 의식(儀式)에 가까운 행위였다.

 

고향 산청으로... 찜질방을 열다

원 대표는 고향 산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동생의 도움으로 ‘허준 마을 참숯골’이라는 숯가마 찜질방을 오픈한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원 대표는 수작업으론 국내 최고라 일컫는 ‘강원참숯’을 찾아가 끊임없이 묻고 배워 가마 여섯 동을 직접 만들었다. 그런데 불이 또 그의 발목을 잡았다.

“오픈 날짜까지 받아 놓고 숯가마에 참나무를 채워 불을 넣은 이틀 뒤 새벽 2시에 전화가 왔어요. 아, 이거 또 느낌이 안 좋은 거죠(웃음). 아니나 다를까, 불이 나서 가마가 다 내려앉았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기술자 분이 나이도 있고 해서 공법이 조금 낡았던 모양이에요. 이건 뭐 딱 보니 답이 없는 거죠. 동네방네 홍보는 다 해놨고 오픈 날짜는 겨우 20일 남았는데. 그래서 강원참숯에 전화를 해 사람을 소개받았어요. 가마 위 뚜껑만 새로 하는데 5,000만원이 들더군요. 어쩌겠어요. 그 돈 내고 다시 가마 지어서 오픈 날짜는 지켰죠.”

결과는 대박이었다. 원 대표는 레프팅 1회, 1인당 흑돼지 구이, 미역국에 밥, 샤워 찜질까지를 더한 32,000원짜리 웰빙 패키지와 레프팅, 비빔밥, 찜질방 코스의 26,000원 일반 패키지로 많을 땐 하루 400~500명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일이 너무 힘들었다. 일이 힘드니 일할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자신이 숯을 직접 굽다 보니 몸도 버텨낼 수 없었다. 원 대표는 찜질방을 접고 ‘암소 한 마리’라는 소고기 식당을 차린다.

 

원봉수 대표와 아들 3형제.

 

세무조사 받은 소고기 식당

원 대표는 식당 메뉴판에 ‘암소 1등급 이상’을 명시하고 장사를 했다. 100% 암소 1등급만 취급했다. 그는 모든 걸 원칙대로 정확히만 하면 사람이 많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직을 원칙으로 삼는 그의 식당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장사가 얼마나 잘 됐는지 세무조사가 뜰 정도였다.

“촌에 있는 가게에서 카드를 너무 많이 긁으니까, 부산 국세청 데이터에 우리 가게가 떴다더군요. 당시 소 한 마리가 850만 원이었는데 소 들어오는 날 세무서에서 들이닥쳤어요. 고향 동네에서 비싸게는 못 받아, 그러지 않아도 운영이 힘들었는데 그렇게 세무조사까지 나오니 황당했습니다. 그들에게 장부 다 던져주면서 내 개인 통장 계좌까지 추적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들도 ‘이 가격으론 우리가 봐도......’ 이러는 거죠. 그런데 조사를 나왔으면 뭐 하나라도 건져가야 하니까 손님을 못 받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따졌더니 우리 쪽 회계사무실에서 뭐라고 하더라구요. 아내도 ‘원칙도 좋지만 제발 남의 말도 좀 들어라’하고. 그래서 예약 손님도 다 취소하고 그랬죠. 어쨌든 그땐 화가 났습니다. 아니 한 접시에 50,000원, 60,000원 받는데 가서 조사를 해야지, 제일 비싸봤자 24,000원 하는 가게에 와서 세무조사라니 말이 되냐는 겁니다.”

결국 세무조사원들은 원 대표가 찜질방 하던 시절 반값이던 소 값을 이유로 세금 180만원을 매긴 뒤 철수했다. 원 대표는 이 식당으로 산청 동종 업계에서 1등을 했다. 비록 돈은 많이 못 벌었지만 후회는 없다.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는 광고와 전기업을 하고 있는 지금도 오로지 원칙대로 하고 있다. 일단 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사람 마음에도 절대 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원 대표는 엑스포광고와 원전기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현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광고와 전기, 그리고 출마

4대보험은 100% 회사에서

하지만 소고기 식당도 오래 가진 못했다. 광우병 파동 때문이다. 원 대표는 식당에 쏟아 넣은 7,000만원을 뒤로 하고 현업인 광고에 뛰어들었다. 6년째 하고 있는 광고업도 그는 보란 듯 산청 관내 최고 자리에 올렸다. 동업 중인 전기 일은 2년 째다.

“광고 쪽이 전망이 있을 것 같아 시작했어요. 광고와 전기는 관련이 많아 자연스럽게 전기 일도 하게 됐습니다. 원전기의 경우, 도로수로원 공무원 2년차 직원에게 '공무원 그만 두고 같이 하자' 제안을 해서 설립하게 됐는데요. 이 친구가 ‘사장님이시라면 함께 하겠다’고 해서 제가 ‘집에도 물어봐라’ 했어요. 그런데 더 재밌는 게 그쪽 사모님이 ‘원 대표님과 하면 돈을 만들어서라도 주겠다’ 했다는 거예요(웃음). 그렇게 원전기는 동업으로 만들게 된 회삽니다. 직원은 현재 광고 쪽 7명, 전기 5명으로 총 12명이구요. 직원들 4대 보험은 회사에서 100% 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인 의식을 가져 달라고 얘길 해요. 그래야 회사가 잘 되니까요.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엔 직원들에게 케이크 하나씩을 반드시 사줍니다. 집에 가서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또 우리 일이 관공서 쪽이 많으니까 지역에도 보탬이 돼야 하지 않겠냐, 하면서 직원들에게 이웃을 돕는 일에도 신경 좀 쓰자 독려하는 편입니다. 다행히 직원들도 공감해주고 있구요.”

원 대표는 산청군의원 예비후보로 지난 6·13 지방선거에도 출마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자신은 출마 의지가 없었지만 “원 사장 같은 사람이 해야 제대로 야무지게 할 것 같다”는 주위의 말이 원 대표 마음을 움직였다.

“처음엔 출마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하는 일이 있어 되게 망설였죠. 제가 그럴 그릇도 안 되고. 단 하나, 제가 자신 있었던 건 옳고 그름, 공정과 정확에 있어선 분명하다는 거였어요. 내 것 네 것 안 따지고 우리 지역에 필요한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일을 만들어올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은 항상 가져왔죠. 저는 군의원이 공무원을 다그치는 역할이 아니라, 잘 하는 공무원들에겐 힘을 실어줘서 공무원들이 더 노력할 수 있게끔 만드는 자리라고 생각해요. 그런 역할이라면 제가 정확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낙선에 대해 전 안타깝지 않은데 주위 분들이 많이 안타까워하시더라고요(웃음).”

18년 객지 생활. 원 대표는 고향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소고기도 먹고 친구들에게 빵도 사줬던 과거, 비교적 잘 살았던 어린 시절을 다시 되찾고 싶다고 말했다. 당연히, 그러기 위해선 성공해야 한다.

“옛날 우리가 살던 집이 아직 있는데 저 집을 다시 사고 싶습니다. 사업에 있어선 무조건 ‘성공’이구요.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정말 없는 사람에겐 내가 줄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 하면서 돈 버는 사람 없다고 하는데, 제가 그걸 깨 보일려구요. 좋은 일 하면서 돈 벌 겁니다. 열심히 벌어 사회에 베풀며 살 거예요.”

글·인터뷰 김성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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