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경 스님, 93년부터 조금씩 넓혀 지금의 수선사
1박2일, 2박3일 힐링 프로그램 운영 ‘템플 스테이’
번화가인 산청읍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수선사는 '숨겨진 명소'다. 연꽃이 펼쳐진 호수와 힐링 프로그램 ‘템플 스테이’, 그리고 경치를 보며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카페까지. 이 모든 게 수선사 주지 여경 스님이 93년부터 지금까지 이뤄놓은 것들이다. 전통 사찰도 아닌, 특별한 지원을 받은 적도 없는 수선사가 ‘한 폭의 그림 같은 절’이 되기까지는 순전히 주지 스님과 신도들의 노력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경 스님이 1993년 처음 수선사를 설립할 땐 돈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출가한 동생이 조금씩 모아둔 돈을 받아 논을 구입했다. 시간이 흘러 인연을 만나면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처음에는 목돈이 필요해 동생에게 받은 것이다.
그렇게 논을 구입한 뒤 첫 건물을 세웠다. 이후 신도들과 스님은 돈이 모일 때마다 조금씩 땅을 사고 건물을 올렸다. 많이 된 건물은 22년과 25년, 법당은 10년, 마지막은 2013년도 산청한방엑스포 당시에 지어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2019년인 지금도 수선사는 완성된 것이 아니다. 지금도 한 폭의 그림 같은 절이지만 여경 스님은 앞으로도 할 일이 많다고 한다. 스님은 “30년 가까이 절을 관리하고 가꿨다. 절도 시대의 트렌드에 어느 정도는 맞춰야 한다. 앞으로는 절 인근 산을 꾸미고 싶다. 그래서 누구나 수선사에 오면 멋진 경치를 감상하며 힐링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자 : 종파에서 지원을 안 해주나요?
여경 스님 : 안 해줍니다.(하하) 불교 계통은 지원을 해주는 게 아니라 종단에 분담금을 내야 합니다. (회비처럼) 1년에 한 번씩 내야죠. 일단 차 한 잔 마시며 얘기해요.
기자 : 수선사에는 연못이 유명한데 언제 만든 건가요?
여경 스님 : 논을 사서 공사를 하다 보니 돌이 나왔어요. 특히 절에 사용 된 돌이 전부 논에서 나왔어요. 공사하려고 돌을 빼내고 물을 모았더니 자동으로 연못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다 '땡잡았다' 하더라고요.
기자 : 절이 생기고 시간이 좀 흘렀는데, 신도 분들은 많은가요?
여경 스님 : 아쉽지만 많이 없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이 소개하고 해줘서 조금 늘어났어요. 또 절이 산청에 있는데, 인구가 적어요. 나이 드신 분들은 무릎도 아프고 몸도 아파서 절에 많이 오지 못하고요.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다들 열심히 살다보니 절에 많이 안 오고요. 그래서 좀 아쉬워요.
기자 : 특이하게 절에 카페가 있어요.
여경 스님 : 산청 분들이 바람 쐬러 오거나 타지에서 수선사를 보러 왔다가 빨리 돌아가는 게 마음이 안쓰러워 카페를 하게 되었죠. 예전에 타지에서 오신 분이 저에게 전화 와서 수선사에 어떻게 찾아가는지 묻더라고요. 위치를 가르쳐주고 나중에 다시 전화해서 ‘수선사 찾았습니까?’ 물어보니 대답이 ‘이미 다 보고 갑니다’ 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손님이 수선에 왔다가 조금이라도 더 머물다 가길 바라는 마음에 만들었죠. 카페라도 있으니까 둘러보고 바로 가지는 않잖아요.

기자 : 절에서 숙박할 수 있는 힐링 프로그램이 있어요.
여경 스님 : 템플 스테이가 있어요. 우리가 앉아있는 이 카페 건물을 2013년에 지었어요. 템플 스테이를 하려고 지은 거죠. 지금은 유명해져서 1년에 5백 명 정도는 와요. 음식이 아주 좋아서 유명해진 거죠.
기자 : 템플 스테이는 보통 누가 이용하는가요?
여경 스님 : 종교랑은 아무 상관없이 힐링 하러 와요. 가톨릭, 기독교, 불교 다 받아요. 힐링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편하게 오면 되는 거예요. 다만 불교 신자들은 저랑 같이 참선도 하고 108배 예불을 해도 되는 거죠. 예약 위주라서 사전 조율만 하면 누구라도 환영해요.
기자 : 템플 스테이에 혼자 올 수 도 있나요?
여경 스님 : 혼자는 힘들죠. 유지가 안 된다고 해야 될까요? 보통 예약손님이 올 때 맞춰서 음식을 만들어주시는 분이 멀리서 오거든요. 그래서 최소 4~5명 정도는 돼야 하는 거죠. 가족이나 혹은 친구끼리. 멋있는 공간에 맛있는 음식까지 제공하니까 단체로 힐링 하러 오는 거예요.
기자 : 다른 종교 혹은 무교도 가능한지요.
여경 스님 : 누구도 분별하지 않아요. 종교나 사람 모두 구별 없이 편하게 쉬다 가면 좋아요. 다만 무료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돈을 내는 만큼 최상의 음식과 힐링을 제공하는 거죠.

기자 : 스님은 절에 혼자 계신가요? 또 절 관리는 누가하나요?
여경 스님 : 그럼요. 저 혼자 해요. 관리도 다 해요. 처음에 아무 것도 없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혼자 하다보니 노하우가 생겼죠. 제가 신통을 부려서 청소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꾸준히 그냥 하는 거예요. 또 공양주가 없어서 밥도 다 해먹어야 해요. 템플 스테이 예약을 받는 이유가 그런 거죠. 예약 손님이 오시면 멀리서 지인이 절에 와서 음식 공양을 도와줍니다.
기자 : 수선사를 만들 때도 스님이 다 하셨나요?
여경 스님 : 땅을 사고 지금까지 전부 하나씩 다 했어요. 건물을 짓거나 중장비가 들어올 때조차 전부 직영으로 관리·감독을 했어요. 내가 생각하는 걸 쓸모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업체보다 직접 하는 게 좋거든요.
기자 : 절에서 생활은 적적하지 않으신가요?
여경 스님 : 습관이 되어서 너무 좋아요. 한가한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사람 많은 곳에 가면 혼란스럽죠. 뭘 해야 될지 모르고, 그래서 절이 제일 좋아요
기자 : 스님은 성격이 유쾌하고 밝으신 거 같아요.
여경 스님 :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죠. 그리고 사람을 좋아해요. 다만 절에서 만나는 걸 좋아하지,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지는 않아요.(하하) 찾아오는 분들이 너무 감사하니까 같이 대화도 하고 서로 생각도 주고받고 그래요.
기자 : 전 가톨릭 신자인데도, 수선사에 오니 정말 기분이 좋아요.
여경 스님 : 사실 산청에 이런 절이 없어요. 종교를 떠나 경치에 반하죠. 지금 군수님조차 여기 경치에 반해서 자주 와주세요. 군수님과는 예전 엑스포 전부터 인연이 됐는데, 지금까지 수선사를 많이 사랑해주시네요.

기자 : 군수님한테 수선사를 많이 알려달라고 요청해보시죠?(하하)
여경 스님: 군수님이 예전부터 사람들에게 ‘산청에 가면 수선사 가보라’고 많이 얘기해주세요. 누굴 만나도 수선사 자랑을 많이 해요. 한 번은 군수님이 나에게 ‘수선사가 어디 스님 절인가요, 산청 절이죠’ 라고 웃으며 말씀하시더라고요.
기자 : 산청은 관광이 살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수선사가 더 활성화 되면 좋겠어요.
여경 스님 : 신도들 외에도 관광객들이 많이 와요. 작년에 방송이 나가니까 주말엔 500명씩 오더라고요. 요즘엔 절도 관광지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수선사를 더 알리게 해서 ‘산청엔 수선사’가 있다고 알리고 싶어요. 또 사람들이 많이 오려면 진입로나 화장실이 더 좋아야 되는데, 아무래도 절이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산청군과 지속적으로 협의를 하고 있어요.
기자 : 산청에도 절이 많은데, 그 중에서 특히 수선사가 최신 느낌이 나요.
여경 스님 : 시대가 변했잖아요. 종교도 어느 정도는 변해야죠. 또 환경 정비부터 주차장, 출입통로 등 내가 하나하나 다 꼼꼼하게 신경 써요. 그래서 한번 온 사람들이 수선사에 정을 많이 붙일 수 있도록 하는 거죠. 또 맛집 찾으러 2시간씩 운전해서 가는 세상인데, 절이라고 그렇게 안 될까요? 가족끼리 혹은 데이트 코스로도 많이 와요. 김해에서도 2시간 거리에서 데이트 하러 오는 커플도 많아요. 아무래도 사람이 왔다 가면 후유증도 있지만 사람들이 산청이라는 곳에 왔다가 만족하고 가면 선순환이 되잖아요. 그래야 군청에서도 저희 절을 잘 봐 줄 거고요.(하하)
기자 : 마지막으로 요즘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겠지만 불교도 신도가 늘어나지 않는데.
여경 스님 : 전체 종교가 다 위축되어 있죠.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종교에 기대를 많이 안 걸어요. 일이 바쁘고, 사는 게 더 중요하죠. 예전엔 여성분들이 주부로 많이 있었지만 요즘은 맞벌이가 대세니까요. 살림도 살고, 애들도 돌보고, 주말엔 쉬어야 되니까 그런 거예요. 아무래도 종교는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점점 위축 될 수밖에 없겠죠. 결국엔 종교도 시대에 맞춰 변해야 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 같아요. 다 같이 노력해야죠.

수선사 주지 여경 스님
현재 환갑을 바라보는 여경 스님은 대구 외곽에서 태어나 도회지로 나가서 학교 생활을 했다.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어 김천고등학교에 진학하기도 했다. 당시 김천고등학교는 육군사관학교 합격률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군사관학교 진학에 실패한 여경 스님은 해병대서 군복무를 했다. 그 뒤 대구에 자동차부품회사인 평화산업이라는 곳에서 근무했다. 직장생활하면서 서울, 광명 등 기아차, 현대차 있는 곳에 계속 출장을 다녔다. 그때 당시 히트 쳤던 차가 프라이드다. 그래서 정신없이 영업과 납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경 스님은 먼저 출가한 동생의 영향인지 ‘월급은 받고 살지만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좋은가’ 또 ‘도를 닦는 게 무엇인가’ 같은 생각이 계속 들었다. 친구들은 결혼을 다 했지만 스님은 결혼에 뜻이 없었다. 그래서 출가를 결심했다. 부모님 종교가 불교였지만 아들이 출가한다니 반대가 심했다. 옛날 분들이라 그냥 이유 없이 출가가 싫은 것이다. 그래도 계속 설득해서 출가 하게 되었다. 80년대 말, 스님 나이 29세였다.
여경 스님은 순천 송광사에 출가했다. 태어나서 처음 전라도 땅을 밟아본 게 출가할 때다. 거울처럼 살아라는 뜻의 ‘여경’이라는 법명을 짓고 스님이 살아가야 하는 방침, 습관, 기본 교육 등을 받았다. 그렇게 송광사에서 스님이 되기 위한 일종의 교육 과정인 ‘강원’을 4년가량 습입해 스님이 되었다.
여경 스님이 공부를 끝낸 1992년 어느 날, 현재 수선사 자리에서 농사를 짓던 스님과 인연이 닿아 논을 구입했고, 그것이 수선사의 시작이었다.
김시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