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전문가, 산청교육지원청 하현희 교육장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전문가, 산청교육지원청 하현희 교육장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1.15 0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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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19년 관리자 20년 교육계 39년차
전통 교육과 미래교육의 균형을 지향해
학생들의 자기결정력키우는시스템필요

 

산청의 하현희 교육장은 올해로 39년째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베테랑이다. 그에겐 교육자인 세 분의 형님이 계셨고 그는 그 중 둘째 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진주교육대학교 79학번인 그는 거제 장승포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해 장학사, 초등학교 교장, 교수 학습부장, 교육지원국장 등을 지내며 관리자로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았다. 80년대 후반, 컴퓨터라는 물건이 막 보급될 무렵 이미 미래 교육의 과제를 어렴풋이 감지한 그는 자연과 선비문화에 기반한 전통 교육과 사물인터넷, 드론에 기반한 미래 교육의 균형을 제시하며 현재 산청교육지원청의 31번째 교육장으로서 자리매김 했다. 하 교육장은 한국의 가장 중대한 교육 현안으로 학생들의 자존감을 제도적으로 키워주는 일을 꼽았다.   

 

▲산청교육지원청 제31대 교육장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산 좋고 물 맑고 사람 좋은 선비의 고장이어서인지 저와 어울릴 것 같은(웃음), 그런 느낌으로 아주 즐겁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진주 출신이십니다. 어릴 때부터 교육자가 꿈이셨나요? 교육자가 되고 싶도록 교육장님께 자극을 준 롤모델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형님 세 분이 모두 교육계에 계셨습니다. 큰 형님은 중등교 교사, 둘째 형님은 초등교 교사, 셋째 형님은 교육부 행정 공무원. 제가 막내인데 저를 키워보시겠다고 중학교 3학년 때 셋째 형님이 저를 서울로 불렀어요. 그렇게 방학이 되면 진주에 내려왔다 개학 직전에 서울로 다시 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보통 남들과 다르게 저는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내고 대학은 진주교육대학교로 진학했어요. 형님들이 다 교육계에 계시니 자연스럽게 보고 느끼며 저도 모르게 젖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롤모델이라면 둘째 형님인데, 통영 우도에서 근무하며 늘 열심히 하는 모습을 흠모했던 기억이 납니다. 방학때 우도 섬으로 가서 둘째 형님 도움을 받기도 했죠.

▲기억에 남는 은사님이 계신지요?

제가 금곡중학교 1회 졸업생인데요, 그때 국어를 담당하셨던 최명림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금곡면 출신이셨는데 고향에서 후배들을 교육시키겠다는 대단한 열정을 지닌 분이었죠. 제가 깊이 영향을 받았고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특히 금곡에서 고성 문수암까지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걸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고모님 댁이 있는 상리 삼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오곤 했는데 이젠 아련한 추억이 됐네요.

 

미디어팜과 인터뷰 중인 하현희 교육장. 그는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커서 진주교육대학교에 진학했다. 교육자로선 올해 39년째를 맞았다. 사진=김시원 기자.
미디어팜과 인터뷰 중인 하현희 교육장. 그는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커서 진주교육대학교에 진학했다. 교육자로선 올해 39년째를 맞았다. 사진=김시원 기자.

 

▲대학 다니시던 시절은 어땠습니까?

당시 진주교대는 2년제였어요. 제가 79학번인데 12.12군사반란,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때죠. 시국이 워낙 혼란스러웠던 때라 2년 중 학교는 절반 정도 밖에 못 다녔습니다. 선생님이 되려면 미술, 체육, 음악 등 기능을 많이 익혀야 하는데 그땐 그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방학은 없다시피 했고 단체·집단행동이 많았던 시절이었죠. 군대는 RNTC를 거쳤는데, 군사 훈련 3주 받고 5년간 의무적으로 선생님 생활을 하면 예비역 하사로 제대하는 제도였습니다.

▲81년 첫 교직 생활은 어디서 시작하셨나요? 그때 소감은 어땠는지?

81년 3월1일자로 거제 장승포초등학교에 발령이 났습니다. 홀로 이불 보따리를 메고 버스를 타고 갔어요. 바다를 못 보고 자란 터라 처음엔 장승포가 너무 좋았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1층 자취방에 짐을 풀었죠. 그런데 저녁에는 파도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더라구요(웃음). 정말 파도가 엄청 쳤습니다. 몇 달 지나니까 그마저 자장가로 들리고, 나중엔 후배들도 많이 찾아왔습니다.

▲일반 교사 생활은 얼마나 하신 건가요?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학교 또는 학생이 있다면?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19년 했어요. 전문직 전형에 합격해 거제교육청 장학사로 발령 받고, 마지막 날 교문을 나서면서 더 이상 아이들을 못 가르친다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핑 돌며 기분이 이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생 중에는 90년도였나, 창원 반송초등학교 있을 땐데 ‘컴퓨터 프로그램 경진대회’에 나갈 아이들을 맡아 지도한 적이 있어요. 디스켓도 드물던, 도스 컴퓨터가 막 보급되던 시절이었죠. 평소 호기심이 많아 지금까지 제가 산 컴퓨터만도 10대가 넘을 거예요. 돈 벌어 컴퓨터 바꾸는 게 일이었죠(웃음). 그때 컴퓨터에 재능이 있어 5, 6학년 때 지도한 학생을 ‘전국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에 출전케 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 잠실체육관 플로어 전체에 컴퓨터를 세팅하고 지도 교사들은 관중석에 있었는데, 당시 학생들이 자판 치는 소리가 정말 굉장했습니다. 그때 학생 어머니와 컴퓨터를 차에 싣고 하루 전에 도착해 컴퓨터 설치를 했었죠. 로직을 짜 프로그램을 코딩하는 대회였는데 짧게 짤수록 잘 하는 거였어요. 심사위원들이 일일이 물어보며 심사를 했었습니다. 이름이 송범이라는 친구였는데 이 학생이 그 대회에서 대상을 탄 겁니다. 아마 경남에선 최초였죠. 송범 학생은 과학기술부 장관 상을 받았고, 저는 지도교사로 과학기술부 장관 표창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오사카로 해외연수도 다녀왔습니다. 대상 받고 도착하니 학교에선 이미 교장 선생님이 축하 현수막을 걸어두셨더군요(웃음). 그 친구를 만나고 싶은데 검색을 해도 찾을 수가 없네요. 전 그 기억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을 정도로 당시 짜릿했던 기분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장학사, 초등학교 교장, 교수학습부장, 교육지원국장 등 다양한 교육 분야 경험을 쌓아오셨습니다. 이 경험들은 지금의 교육장님께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관리자로서 올해 20년째를 맞았네요. 지난 커리어는 교육장을 위한 기초 마인드를 갖게 해준 경험들이었습니다. 가령 장학사를 하면서 ‘최종 관리자가 되면 이런 건 저렇게 한 번 해봐야지’하던 생각, 역지사지 자세로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대하는 것, 왜냐하면 세상에 잘못하고 싶어 잘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그런 생각을 갖고 일을 대처할 수 있는 기반이 된, 저에겐 아주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교육장님은 세간에 “온화한 성품에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전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 저는 역지사지 자세를 지향합니다. 제가 교사 시절 때 교육청에서 전화가 오면 뭐 때문인가 불안 속에서 생활해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에 내가 관리자가 되면 그런 어려움을 주면 안 되겠다 생각한 계기였죠. 같은 길이라면 지원 쪽으로 가는 게 맞다 봅니다. 다른 입장에 서면 상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육장 취임사에서 “창의융합형 인재 개발과 함께 물음과 느낌이 있는 교육”을 강조하셨습니다. 두 비전에 관한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학교 입학 전에는 어린이들이 귀찮을 정도로 많이 묻습니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질문이 적어지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교육은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찾고,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교육입니다. 이래서 이랬구나, 느낌이 오도록 하는 교육이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졸업을 해도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와 느낌표로 이어지는 그런 교육. 미래 사회는 한 가지만 잘 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연관이 안 되면 풀리질 않습니다. 상상만 하면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우리 아이들이 갖춰야 할 역량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때, 그게 바로 ‘창의융합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변화시키고 융합시키고 만들어내는 역량. 그것을 아이들로부터 이끌어내자는 취지에서 한 얘기였습니다.

▲지금 산청 교육 현장에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산청 교육 특색을 보면 생태를 활용한 약초 사랑 교육, 경의 정신을 실천하는 선비 교육으로 이 지역에 최적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특히 산청한방약초축제가 지난해 12월31일자로 한국대표축제로 선정됐는데요. 한국대표축제는 전국 수 백 개 축제들 중 3개 축제에만 주는 이름인 걸로 압니다. 저는 이에 약초 사랑교육 특화가 일조를 했다고 보고 ‘이건 이어 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지금 산청에는 옛 약초꾼들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배울 건 배워야 합니다. 효능 뿐 아니라 재배 방법까지 다 아는 약초꾼이 지금 산청 교육엔 필요합니다. 약초꾼이 사라지는 건 도서관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저는 봐요. 또한 선비문화교육원으로 대표되는 남명 조식 선생님의 선비정신, 경의정신을 본받도록 하는 체험 교육을 심화발전 시키는 일도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좋은 인재로 키워 그들이 전국 어디에서든 직장생활을 하고 퇴임하면 다시 산청으로 돌아오고 싶도록 하는 것, 어릴 때 꿈을 심어준 곳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이 제 복안입니다. 물론 영상, 드론, 사물인터넷, 코딩 등 미래 교육도 등한시해서는 안 될 겁니다. 기본이 돼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여건이 된다면 드론을 활용한 학교홍보동영상 및 산청홍보동영상 대회도 한 번 열어보고 싶습니다.

 

지난해 11월27일 ‘하반기 산청학부모네트워크 소통 협의회’ 현장.
지난해 11월27일 산청군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린 ‘하반기 산청학부모네트워크 소통 협의회’ 현장에서.

▲교육장님은 현재 한국 교육의 가장 중대한 현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그 현안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결정력, 그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도적으로 자존감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또 돈의 가치, 노동의 기쁨과 보람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은 자기가 뿌린 씨앗이 났는지 안 났는지에는 관심이 가게 마련입니다. 텃밭 가꾸기, 재배 교육 등 자연을 활용한 교육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생명 사랑은 곧 인간 사랑으로 이어지지요. 어릴 때는 시골이 도시보다 교육 환경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은 책을 통해 배우고 지혜는 자연에서 배웁니다. 흙을 만지면서 그 위를 맨발로 걷는 일은 사소해보이지만 아이들에겐 큰 의미를 갖는 일이기도 합니다.

▲살아오면서 인간 하현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그리고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한 권만 소개해주세요.

제가 7남매 중 막냅니다. 전 몇 마지기 되지 않는 땅을 일궈 우리 공부를 다 시켜낸 부모님을 가장 존경합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학비를 제때 안 준 적은 없다는 것에 늘 자부심을 가지셨죠. 유비무환. 당신들은 못 입고 못 먹어도 자식들 공부만큼은 제대로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오신 두 분이었습니다.

책이라면 8년 전에 읽은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를 꼽고 싶네요. 제가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손놨던 책이라는 걸 다시 읽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내용이 창의적이었죠. 그 책을 본 뒤 1년에 100권을 읽어보자 생각을 가지게 됐고 이후 다산 정약용, 훈민정음 간송본, 추사 김정희 등에 빠져 지냈습니다. 읽을 책이 없으면 마치 양식이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요즘도 잠자리엔 항상 4, 5권 책을 구비해둡니다. 선택이나 결정을 하기 위해선 '책이 답이다'는 생각으로, 책을 가까이 두게 한 책이 바로 <책은 도끼다>였습니다.

김성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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