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제31대 진주교육지원청 교육장 취임
주체적 '경의정신'과 상생의 '대동정신'이 곧 '진주정신'
"아이 스스로 자라도록 환경 만들어주는 게 어른 역할"
그는 진주에서 60년 가까이를 살았다. 1980년 3월 거창 웅양중학교를 시작으로 교편을 잡은 그는 시 한 편으로 한 시간 동안 학생들 마음을 쥐락펴락한 중·고등학교 국어선생님들의 영향으로 자신도 국어선생님이 되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줄 아는 '경의정신'과 다 함께 잘 살자는 '대동정신'을 진주정신으로 보는 그는 '아이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교육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자질이라고 말했다. 우리 겨레의 정신이 담긴 토박이말 교육과 진주를 소재로 삼는 문화예술가의 성장 환경을 조성하고, 문화·예술·과학이 함께 어우러지는 새 세상이 진주이길 바라는 제31대 진주 교육장. 진주교육지원청 심낙섭 교육장을 미디어팜이 만나고 왔다.
▲31대 진주 교육장에 취임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취임 후 9개월 가까이가 되었는데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먼저 어깨가 무겁습니다. 진주는 혁신도시와 신역세권 도심지, 그리고 구도심지 공동화현상으로 교육 여건이 옛날과 많이 달라지고 있는데요. 이러한 교육 환경 변화에 따라 저희로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유치원 포함 146개 교육 시설, 학생 수 4만 6천명에 교원 수는 3000명을 훌쩍 넘는 진주가 ‘아이들 키우기 좋은 도시’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교육장으로서 정책을 잘 펼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을 통해 진주가 잘 사는, 행복한 진주가 됐으면 좋겠다는 게 제 소망입니다.
▲1980년 거창 웅양중학교에서 교사의 첫 발을 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를 회상해본다면 어떻습니까.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나네요. 80년 3월, 거창은 대학 졸업 후 첫 발령지였습니다. 경전여객 버스를 타고 아침에 출발해 함양을 거쳐 거창에 도착, 다시 비포장도로를 거쳐 부임지에 갔는데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과연 여기서 생활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시골 마을이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순박하고 천사처럼 선생님을 잘 따랐습니다. 근무 여건은 몰라도 교사로선 한껏 존중받는 느낌, 교사하길 잘 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루는 출근해서 보니 먼 산을 넘어 등교한 아이들 신발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는데,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산을 넘어 온 것이죠. 그리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기다렸다는 듯 “선생님~” 부르는 소리를 듣는데, 세상에 태어나 이토록 사람에게 존중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요즘 선생님들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과연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존중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을까라는 생각. 근래 모 학교에 첫 발령을 받은 선생님이 수업을 하다 울고 나온 일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더는 아이들로부터 존중을 받지 못하는 교단 분위기가 된 것이죠. 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물론 그 원인이 아이들에게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 교육장으로서, 우리 지역 선생님들이 행복하게 교단에 설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반대로 교단을 떠나실 때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요.
어렵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제가 했던 일들에 보람을 느낍니다. 교단을 지켜나가는 후배들이 좀 더 보람으로 일할 수 있도록, 그런 교단 풍토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9년 교사 생활 동안 특별히 생각나는 일이나 학생이 있다면.
아무래도 첫 발령 때 만난 두메산골 아이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그 중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 졸업 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마산 자유수출지역에 있던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현 한일여자고등학교)에서 공부했던 학생이 떠오르네요. 10년 전 경남도교육청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그 제자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어린이집 원장이 됐더군요. 그 친구와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가슴이 짠했습니다. 그 어려운 환경을 딛고 자기 일을 하는 사회인이 되었다는 것이 무척 대견했고, 그 아이가 여태껏 얼마나 성실하게 또 진정성 있게 살아왔는지를 느꼈습니다. “그때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셨던 정과 마음들이 오래 남아있었어요. 그 시절 선생님 이야기들에 힘을 얻어 나름 열심히 생활했죠. 마음 속 깊이 고마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의 말이었습니다. 전 이런 학생들을 좋아합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기 나름의 삶으로 이끌어내는 학생들 말이죠.
▲교육자를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다면요.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선생님이 수업하는데 ‘어쩜 저렇게 말씀을 잘 하실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 한 편으로 1시간 동안 학생들 마음을 움직이는, 나도 저런 좋은 선생님이 돼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실제 저에겐 수업 시간 작품이나 글을 통해 사람 마음을 움직였던 은사님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교단에서 국어를 담당했던 저 자신을 돌아봤을 땐 글쎄요, ‘수능 시절’이었던 탓일까요, 학생들에게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웃음).
▲고향은 진주인가요. 교육장님의 성장기 집안환경 및 학창시절은 어땠는지 듣고 싶습니다.
진주에서 근 60년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고등학생 시절엔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어요. 먹고 살 만 했죠. 그 시절 친구들도 저와 비슷했을 것이라 봅니다. 가정환경은 무난했구요, 저 스스로는 조용한 성격이었습니다. 교단에 들어서면서 성격도 바뀌었죠.
▲언젠가 “진주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을 강조하셨습니다. 교육장님이 말씀하시는 ‘진주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정신입니다. ‘경의정신’이랄까요. 논개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해보죠. 진주에서 논개가 인정받은 건 그가 죽고 150년 세월이 흐르고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영조 16년(1740년)에 겨우 ‘의기’라는 사당을 짓게 된 것이죠. 이는 당시 진주 사람들이 해마다 논개가 죽은 날 남강에서 제사를 지내고, 목민관들이 진주에 오면 논개 사당에 관한 상소를 임금에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얘기했기 때문입니다. 옳은 것이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곧 진주정신입니다.
또 하나는 ‘대동정신’입니다. 함께 잘 지내고자 하는 정신이죠. 형평운동이 좋은 예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대변하면서 함께 잘 지낼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진주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한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진주정신은 멈추지 않고 나름 면면히 흘러왔다 생각을 합니다.
▲흔히 진주를 ‘교육도시’라 부릅니다. 왜 그렇게 부르는 걸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교육장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진주는 고려 이후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곳입니다. 1895년 근대에 들어서도 한강 이남에선 최초로 경상우도소학교가 지어진 곳이 진주죠. 진주엔 교육 선각자들도 유달리 많았는데 진주여고를 건립한 허만정 선생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분들이 태어나고 공부를 했던 곳이 바로 진주입니다. ‘인재의 절반이 영남에서 났고 영남 인재의 절반이 진주에서 났다’는 건 절대 허황된 말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진주는 ‘교육도시’라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교육자로서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아이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우수한 교사가 교단에서 학생들을 이끌어 우수한 인재로 길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바탕에는 늘 아이에 대한 사랑과 믿음, 기대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육자의 최고 덕목은 사람을 좋아할 줄 아는 것,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요. 그리고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 진실한 마음은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는 법이니까요.
▲학생, 학부모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교육지원청이 가장 챙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공감입니다. 그 공감의 틀을 만들기 위해선 저희가 먼저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저희 교육지원청엔 1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이 인력으로 관내 4만6천 학생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현장을 알아나가야 합니다. 중요한 건 현장입니다. 현장에 다가가야 학부모와 학생들이 마음을 열고 다가옵니다. 교육청에 ‘지원’이 붙은 지 10년이 지났는데요. 말뜻 그대로 현장의 어려움을 ‘지원’하는 일을 해야 하는 관청이 바로 교육지원청입니다. 전 직원들이 우리의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봐요. 하소연 한다고, 대립각을 세운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공직자로서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학생, 학부모들께 저희 진정성이 전해질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보건 복지부와 교육부, 법무부와 여성가족부 등이 아동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해 부모의 체벌을 금지하겠다는 이른바 ‘포용국가 아동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교육장님은 이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교단 사람들과 어른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아이는 성숙하지 못한 대상임엔 틀림없지만 어른이 하는 것이 반드시 옳기 때문에 어른이 하는 대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엔 찬성할 수 없습니다. 무릇 싹이란 자기 힘으로 물을 빨아올려 절로 피어나야 하는데, 빨리 자라나라고 뽑아버리면 죽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아이의 힘으로 자라나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고 보살펴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입니다. 체벌을 하지 않으면 어렵고 힘든 점이 분명 있겠지만, 그럼에도 사람 본연의 마음을 회초리로 변화시킬 순 없습니다. 한국에서 ‘소년운동’을 제일 먼저 펼쳤던 강영호 같은 분도 아이들을 존중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하셨죠. 1930년대 무렵 선생이 했던 생각입니다. 9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을 사는 우리의 관점이 90년 전 생각에도 못 미쳐서야 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임기 동안 꼭 해보고 싶거나 도입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정책을 펼치려 들면 현장이 힘들어집니다. 그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내실을 다질 수 있도록 하면 족할 겁니다.
그중 토박이말 교육이 있는데요, 사투리가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 겨레가 쓰던 우리말을 잘 찾아 부려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지나치게 멀리 있는 것, 들어온 것들만 좋아하고 부러워하면 우리 것을 찾아볼 수 없게 되지요. 우리말에는 우리의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어려운 말을 쓰는 사람, 쉬운 말을 쓰는 사람 사이에 계급이 생기면 힘없는 사회가 되는데 그것 말고,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대동정신'이 다른 게 아닙니다.
또 하나 우리 지역 문화와 관계되는 문화예술가가 진주에서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남강을 봅시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낙동강 하구에 이르러 태평양까지 이어집니다. 비봉산 산줄기 역시 타고타고 올라 백두대간을 지나 만주벌판, 나아가 유라시아 대륙에까지 뻗습니다. 이런 기세를 담아낼 수 있는, 진주를 소재로 하는 소설가와 영화감독 등 콘텐츠를 개발해 진주 먹거리를 문화콘텐츠에서 개발할 수 있는 진주의 아이들이 많이 길러졌으면 합니다. 대륙문화와 해양문화가 만나는 장면들을 그린 문화콘텐츠, 그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야기꾼들이 진주에서 많이 나왔으면 싶습니다.
끝으로 혁신도시 내 첨단공공시설들이 들어와 있는 만큼 새로운 과학 개념들을 진주 아이들이 자주 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과학의 기초인 수학체험관, 경남예술교육원 해봄, 과학고등학교의 자원들, 그리고 혁신도시 공공기관들까지. 문화, 예술, 과학이 함께 어우러져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아이디어가 더 많은 진주 학생들로부터 나와주길 기대합니다.
김성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