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 장의 그림에 모든 걸 쏟아내다" 진주 출신 일러스트 작가 이연화(YeoNwa)
[인터뷰] "한 장의 그림에 모든 걸 쏟아내다" 진주 출신 일러스트 작가 이연화(YeoNwa)
  • 김성대 기자
  • 승인 2020.02.0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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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출생...유치원 때 진주로 와 학창시절 보내
사천고등학교 진학해 꾸준히 그림 그려 작가 꿈 키워
경기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서 '현실적 그림' 배워
도쿄 '어플리봇' 스카웃 제의...일본서 2년간 생활
"연화(YeoNwa)라는 브랜드 가치 높이고 싶다"

일러스트 작가 이연화(필명은 'YeoNwa', 카타카나로는 '요나(ヨナ)'로 쓴다-편집자주) 씨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진주에는 유치원 때 와 평거초등학교, 경해여자중학교를 거쳤고 고등학교는 사천으로 진학했다. 어린 시절 클램프(CLAMP), 타케우치 나오코 등의 일본 만화와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던 그는 일본에선 '신(神)'으로 통하는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을 따라 그리며 본격 그림 세계에 입문했다. 그의 첫 꿈이었던 만화가는 고등학교 때까지 목표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다른 길을 택한다. 공식과 정답을 정해놓은 학원식 '입시 미술'에 흥미를 잃은 그는 울산애니원고등학교 진학을 원했지만, 마지막 그림 한 칸을 채우지 못해 뜻을 꺾어야 했다. 이후 사천고등학교로 간 이 씨는 만화가 아닌 '그림'을 계속 그려나갔고, 서울 '코믹월드'라는 행사에 직접 참가하는 등 온오프 라인을 통해 친구들도 많이 사귄다. 

'예술'이 아닌 '상업적 그림'을 지향했던 이 씨는 경기도에 있는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 진학, 거기서 현실적 가르침을 듬뿍 흡수한다. 대학 졸업 후 그는 국내 모바일 게임 회사에 입사한 뒤 틈틈이 네이버 카페(방방곡곡 창작을 배우는 사람들)에 그림을 올렸는데 이것이 일본 스마트폰게임 전문 개발사 어플리봇(Applibot)의 관계자 눈에 띄어 그는 곧 프리랜서 길을 걷게 된다. 이유는 어플리봇에서 외주 받은 그림 한 장 작업비가 당시 모바일 게임 회사에서 받던 월급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어플리봇 일을 계기로 조금씩 외주 범위를 넓혀가던 그는 끝내 설득에 못 이겨 도쿄 현지로 가 어플리봇에 입사, 2년간 일본 생활을 하게 된다. "마치 꿈 속에 있는 것 같았"던 일본에서 짧고 굵은 경험을 한 그는 2015년에 다시 한국으로 귀국해 2020년 2월 현재까지 한중일을 넘나들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업계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러스트레이터 YeoNwa를 진주시 평거동 카페 향기와 멋에서 만났다.     

YeoNwa의 그림은 화려하다.
'스펙터클 판타지' 정도로 간추려볼 수 있을 YeoNwa의 그림은 화려하다. 어린 시절 클램프, 타케우치 나오코를 동경했던 그의 취향은 프로가 되어서도 작품들에 그대로 녹아 있다. 그림출처=YeoNwa 트위터.

<세일러 문>과 <드래곤볼>에 빠지다

진주에서 나고 자란 건가.

태어난 곳은 부산이다. 아버지께서 장남이시고,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유치원 때까지 함께 살았다. 진주에선 평거초등학교와 경해여자중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는 사천으로 진학했다.

만화 또는 그림에 관심을 가진 건 언제부터였나.

어릴 때 판타지 소설과 일본 만화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특히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만화로도 이런 스토리를 연출할 수 있구나, 하고.

초등학생 때부터 만화가를 꿈꿨던 건가.

그랬다. 만화가가 내 첫 꿈이었다. '기름종이'를 대고 <드래곤볼>을 따라 그린 걸 시작으로 일본 만화가 집단 클램프와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으로 유명한 타케우치 나오코의 그림을 동경하며 컸다. 어린 마음에 반짝이고 예쁜 그림체를 선호했던 것 같다.

만화가 꿈은 중,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고 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만화에 빠졌다. 구체적으론 그림과 게임, 소설에 빠졌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겠다. 특히 90년대 후반 천리안, 나우누리 같은 PC통신을 접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학교 공부보다 그림이 더 재밌었고, 재미가 있으니 이걸 업으로 삼고 심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로 학원을 다니기도 했나.

미술 학원을 다녔는데 만족스럽진 못했다. 공식과 정답을 정해놓고 이렇게만 그리라는 주입식 '입시 미술'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처음엔 울산애니원고등학교엘 가려 시험을 봤는데 마지막 한 칸을 마무리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다. 

그래서 사천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로 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놀 듯이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그리면서 인터넷을 통해 친구들도 많이 알게 됐다. 한 번은 서울에서 여는 '코믹월드'라는 행사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부모님이 "가서 경험해봐라" 하셔서 직접 굿즈를 만들어 가 팔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좋은 경험이었고, 세상에는 잘 그리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걸 알게 된 계기였기도 했다.

만화보단 '그림' 자체가 더 좋아

대학은 어디로 진학했나.

고등학교 1, 2학년 때부터 가고 싶은 대학교가 있었다. 경기도에 있는 청강문화산업대학교라고. 내신만 100% 보는 수시 1차에선 미흡했지만 채색 없이 만화 실기를 함께 봤던 수시 2차를 통해 입학했다. 

왜 그곳이었나.

제가 다닌 만화창작과는 상업적인 만화를 전공하는 곳이다. 세종대나 홍대 등 굳이 4년제 대학엘 가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좋은 대학엘 간다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나에게 필요했던 건 '예술'이 아닌 '현실적인'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청강을 선택한 것이다. 웹툰 시장 등 당장 현실에 관한 것들을 많이 알려줘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만화가는 되지 않았다.

학교를 다니면서 배워보니 만화는 너무 힘들었다. 만화는 '그림'보단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그림 그리는 게 좋다. 한 장에 내가 공들여 작품을 그려내는 일이 나와 더 맞다고 생각했다.

졸업 후엔 어땠나.

졸업 후 방황을 좀 했다. 내 생각에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니었다. 그림으로 돈을 벌고는 싶은데, 당장 할 수 있는 건 광고에 들어가는 단순한 작은 그림 정도였다.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어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시간을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청강대학교를 2년 더 다녔다.(이 씨는 청강문화산업대학교 2년제를 졸업했다-편집자주) 그러면서 졸업하면 게임 회사에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취업을 서둔 이유가 따로 있는지.

장녀로서 책임감이 있었던 것 같다. 빨리 취업해서 가족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 그렇게 졸업 후 국내 한 모바일 게임 회사에 취업을 했다. 

네이버 카페 '방사'에 올렸던 이 씨의 그림들. 도쿄에 있는 모바일게임 전문 개발사 어플리봇 관계자가 이 작품들을 보고 YeoNwa에게 외주 일을 주고 끝내 일본에까지 스카우트 했다.

인터넷에 올린 그림이 일본 업계 사람의 눈에 띄었다는 얘길 들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내 그림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이버 카페 '방사(방방곡곡 창작을 배우는 사람들)'에 수시로 그림을 올렸고 도쿄 어플리봇의 한 관계자(한국어 번역 매니저)의 눈에 띄었다. 당시 학습만화, 타투 등을 그리던 남자친구(현 남편)가 조언을 많이 해줬다. 남자친구는 나에게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고, 자신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나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 전까진 좀 나태했는데 남자친구를 보며 정말 이를 갈고 했던 기억이 난다.(웃음)

그렇게 결국 프리랜서 길을 선택했다.

어플리봇에서 외주를 줬는데 그림 한 장에 당시 내 한 달 월급보다 많은 작업비를 받았다. 상식적으로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게 맞는데, 외주는 언제 끊길 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도 회사는 계속 다녀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남자친구가 "그만 둬라. 외주 일로 포트폴리오 쌓으면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조언했고 결국 외주 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면서 다른 외주 일이 2, 3개 더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경력, 실력이 딱히 없어 정말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끌어모아 그렸다. 중학교 때부터 동경했던 일을 하고 있다는 게 그저 감개무량 했고, 잠을 덜 자도 마냥 행복했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 생긴 계기였다.

일본에선 '완성된 사람'보다 '발전 가능성 있는 사람'을 대우

어플리봇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해온 것으로 안다.

제가 현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 그리는 편은 아니었는데 딱 하나, 회사에서 원하는 피드백을 불평없이 다 해줬다. 담당자에게도 말을 정성스럽게 했고. 그랬더니 어플리봇에서 '얘를 키우고 싶다' 했나보다. 일본 기업들은 한국과 달리 완성된 사람보다 발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으로 갔다.

반 년 정도를 거절하다 2013년도에 갔다. 예술 관련 비자 준비에 특히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가서 2년 정도 회사 생활을 했다. 일본 생활은 신선했고 지내면서도 계속 얼떨떨했다. 마치 꿈 속에 있는 듯한 느낌? 특히 국내 게임 회사에선 그림 그리는 사람이 제일 밑이었는데, 일본에선 정반대였던 점이 흥미로웠다. 그곳에선 그림 그리는 사람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에 맞는 예우를 최대한 갖춰 대한다. 한국에선 '작업자'에 불과하던 일러스트레이터가 일본에선 '작가' 대우를 받는 것이다.

일은 어땠나.

일은 힘들었다. 다들 실력이 출중해,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느낌으로 그렸던 것 같다.(웃음) 첫 반 년 정도는 정말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1년 종사자와 10년 종사자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많이 배우고 왔다.

어플리봇을 그만 둔 이유는.

계속 회사 관련 그림만 그리면서 갇히는 느낌이 들었다. 더 발전하고 싶었고,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선 회사를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놔주지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엔 왜 가느냐고 했다. 결혼 등 몇 가지 사정을 얘기했더니 놔주더라.(웃음) 물론 한국에 가서도 계속 일을 해달라고 해서 이후로도 어플리봇 일은 해왔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나.

프리랜서 일을 하고 있다. 주로 일본 외주 일이 많이 들어오는 편이고 스마일게이트('큐라레: 마법 도서관'), 빅볼('사커 스피리츠') 같은 회사와도 일했다. 중국 쪽 일도 있는데, 넷이즈라는 회사에선 따로 스카우트 제의가 왔었지만 내키지 않아 거절했다. 홍익대학교 인근 '이고아트 아카데미'에선 학생들도 가르친다.

2012년 공모전 개편 이후 시드노벨의 첫 라이트 노벨 공모전 대상을 탄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약칭 '용마무우')>의 표지 그림. YeoNwa는 작가 토브로부터 바통을 이어 받아 이 시리즈의 9권부터 일러스트를 그렸다. 사진=시드노벨/시드북스 제공.

'이연화' 하면 '잘 한다'는 말 듣고 싶어

내가 하는 것과 남을 가르치는 일은 분명 다를 것 같다.

맞다. 가르치는 일은 설명을 해야 하는 일이다. 단, 내 생각에 기대 설명을 하면 학생들이 잘 못 알아듣기 때문에 무조건 '쉽게'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기초 책들을 찾아보고 필기하면서 요즘 공부를 다시 하고 있다. 학생들은 실력과 재능이 다 제각각이어서 수업은 1:1 맞춤별로 한다.

그래서 만화가 꿈은 끝내 접은 건가.(웃음)

접었다.(웃음) 만화는 무언가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본다. 저는 그저 한 장의 그림을 잘 그려 칭찬 받고 싶다.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잡아서 그린 뒤 오는 기쁨, 뿌듯함. 그걸 만끽하고 싶다. 일러스트와 만화는 다른 장르다.

'YeoNwa'의 앞으로 계획은 뭘까.

나중에 제 학원을 직접 운영해보고 싶다. 더 멀게는 국내와 해외에서 유명한 사람이 돼 '이연화' 하면 '잘 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연화(YeoNwa)라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싶다. 물론 기회가 된다면 제 이름을 새긴 책도 낼 생각이다.

글·인터뷰/김성대 기자 그림제공/Y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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