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은 조심스러운 말이다” 연필 초상화의 대가, 안우홍 화백
“‘완성’은 조심스러운 말이다” 연필 초상화의 대가, 안우홍 화백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6.06 18: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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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EBS, YTN 등 방송 전파
진주 촉석루 남강변 벽화시공으로 벽화 시작
친형 “오직 실력으로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승마코치 된 사람"
연필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안우홍 화백. 그는 오직 독학으로 연필 그림의 대가 반열에 올랐다.

그는 그림에 재능이 없었다. 그가 그림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고등학생 때. 이때 안 배우면 미대를 가고 싶어도 못 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반대했다. 가출까지 하며 부모의 반대에 맞선 아들의 마음은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깊은 감정의 골로 남아 그 아들을 괴롭혔다. 아들은 세월이 흘러 그때 부모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철없을 땐 알 수 없었던 어머니의 눈물을 이제야 아들이 이해하게 됐다. 사실 부모님의 반대는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비롯됐었다. 자식을 미대로 진학시킬 수 있을 만큼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고등학생 아들을 시내 화방으로 데려가 미술용 연필 한 자루를 사주셨다. 어머니는 그러면서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다다"라고 말씀하셨다.

피카소 작품 중 가장 비싼 건 초상화

연필 초상화의 대가 안우홍 화백은 거의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그가 미술과 관련해 체계화된 조직을 거친 건 중학교 때 부모님 몰래 꼬부쳐둔 용돈으로 다닌 미술학원과 고등학교 3학년 때 정식으로 다닌 미술학원이 전부다. 고3 시절 그에겐 시간 여유가 없었다. 10여년을 준비해 미대 입시를 보는 사람도 합격할까 말까한 곳에 1년도 안 되는 시간을 투자해 진학하겠다는 생각은 무모했다. 결국 제도권 미술 교육은 그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돈을 덜 들이고 그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 끝에 그가 찾아낸 것은 바로 정밀묘사였다. 정밀묘사는 연필과 도화지만 있으면 됐다. 그렇게 안 화백은 연필 쪽으로 빠졌다. 이걸로 갈 때까지 가보자고 그는 다짐했다. 연필 인물화의 시작이다.

“20살 때부터 이쪽 길로 가보자 생각했어요. 당시엔 서적도 인터넷 정보도 없었죠. 주변에 초상화 그리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 전 제가 잘 그리는 건지 못 그리는 건지 문제가 뭔지 조차 잘 몰랐습니다. 제가 인정을 받기 시작한 건 스무 살 때 취업할 생각으로 다닌 디자인 학원에서였어요. 한 선생님이 ‘그림 한 번 내봐라’ 해서 그린 초상화가 있었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죠. 선생님은 ‘전문적으로 배워라, 실력이 아깝다’며 대학진학을 놓고 저를 반년 동안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전문대 디자인과를 갔어요. 물론 초상화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죠.”

안우홍 화백의 작품. 이것은 카메라로 '찍은' 니콜라스 케이지 사진이 아니다. 연필로 '그린' 니콜라스 케이지다.
1974년 서울 시가지 모습. 안 화백이 먹과 연필로 감행한 회화적이면서 사실적인 표현이 압도적이다.
1974년 서울 시가지 모습. 안 화백이 먹과 연필로 감행한 회화적이면서 사실적인 표현이 압도적이다.
안 화백은 자신의 모친도 그림으로 남겼다. 주름과 머리카락 묘사 등 그동안 자신이 그린 연필 초상화들 중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안우홍 화백은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거장들 작품 중에도 유명한 연필 습작이 많다"고 했다. 미술엔 조소, 동양화, 한국화, 섬유공예 등 다양한 분야가 있지만 가장 어려운 분야는 역시 초상화라는 얘기다.

"초상화는 1mm만 틀려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거든요. 형태는 같을지언정 명암이 다르면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초상화를 잘 그리는 사람들은 다른 미술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냅니다. 피카소도 초창기엔 사실적 인물화를 그리다 뒤에 추상 쪽으로 넘어간 사례인데요. 실제로 피카소 그림 중 가장 비싼 건 사실적 초상화인 ‘파이프를 든 소년’입니다. 할 줄 알면서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죠. 연필로 그릴 줄 알면서 무시하는 것과 그릴 줄 모르면서 업신여기는 건 다른 겁니다.”

안 화백은 디자인 학원을 다니던 1991년도에 자신의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그때 그린 그림이 가장 크고 가장 오래 됐다고 말한다. 당시 화제를 불러일으킨 그 그림은 20살 연륜에선 결코 나올 수 없는 그림이었다고 안 화백은 회상한다. 지금까지도 그 그림을 대체할 수 있는 자신의 그림이 없다고 그는 고백했다.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당시 그 그림 수준까지 가려면 수 백, 수 천 장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지만 안 화백은 불과 몇 장만 그려서 거기까지 갔다.

연필초상화의 기법과 활용

조금씩 경지에 이르러가던 안우홍 화백이 2006년에 책 한 권을 낸다. 제목은 ‘연필초상화의 기법과 활용’. 반응은 괜찮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조금씩 유명세를 탔다. 전시회에도 몇 차례 참여했고, LG그룹이 후원해 LG그룹이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이후 EBS, KBS, YTN 등 방송을 탔었고 다음,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 쪽에서도 기사화 되었다.

“방송국 쪽에서 함께 하자는 제안들이 있었는데 다음으로 미루면서 결국 성사되진 못했어요. 특히 EBS교육방송 쪽 제안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쉽게 유화 그리는 방법'으로 스타가 된 밥 로스라는 화가와 비슷한 콘셉트로 연필 그림을 다뤄보자 했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까운 콘셉트예요. 아마 유튜브로까지 활용했으면 ‘대박’이 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36살 때 낸 안 화백의 책 <연필초상화의 기법과 활용>. 한때 교보문고에서 해외서적, 미술단행본들까지 포함해 두 세달에 한 번씩 하는 판매순위 집계 때 11위까지 갔던 책이다. 책은 지금도 꾸준히 나가고 있다.

책 <연필초상화의 기법과 활용>은 과거 SBS 심야 프로그램에도 잠깐 나왔다. 노출된 시간은 2.5초. 숨 한 번 쉬면 지나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방송의 힘은 대단했다. 방송이 나간 다음날, 미술용품 쇼핑몰도 함께 운영하고 있던 안 화백의 전화기엔 불이 났다. 4만원 가까이 되는 연필 그림 전문 서적을 교보문고가 300권 가까이를, 알라딘과 예스24,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인터파크 등에서도 몇 백 권 단위로 한 달 넘게 주문을 넣었었다. 방송에서 해당 책을 언급해준 사람에게 안 화백은 감사 표시로 미술세트를 풀세트로 보내줬다.

“사실 책을 내고 초상화와 인연을 끊으려 했습니다. 접으려고 했죠. 하지만 인연을 끊기는커녕 더 알려졌습니다. 제주에서도 일본에서도 저에게 그림을 배우겠다며 보따리 싸들고 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벽화가 주업...첫 작품은 진주 ‘촉석루’ 벽화

현재 안 화백은 벽화를 주로 그린다. 연필 그림은, 끈은 놓지 않고 있지만 생업으로선 여의치 않은 게 현실이라 잠시 보류해둔 상태다. 벽화의 시작은 진주였다. 2005년 1월 촉석루 앞 남강변 벽화시공이 그가 잉태한 첫 작품이었다. 2015년 가을 사천 정동면 학촌 마을에 남긴 ‘고려 현종 부자상봉길 벽화공사’ 역시 그를 세상에 알린 주요 작업이다. 이 외에도 안 화백은 벽화마을 조성 등 관공서 벽화, 커피숍·식당 등 상업시설, 어린이집·학원시설 등 어린이 시설, 학교 건물 등 학교교육시설까지 벽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자신의 실력을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실력 발휘를 할 준비가 돼 있다.

2005년 1월 그가 제작한 길이 142미터 촉석루 벽화.
2005년 1월 그가 제작한 길이 142미터 촉석루 벽화.

“처음엔 벽화에 관해 아는 게 없었어요. 그냥 재밌을 것 같았고 실제 해보니 재밌는 일이었죠. 32살 정도에 시작했는데, 촉석루 인근 남강변 벽화는 제가 그린 것들 중 가장 큰 그림입니다. 요즘엔 학교 건물 색채 디자인과 건축 도장 쪽 일을 하고 있어요. 저에게 벽화는 육체적으로 힘든 작업이지만, 연필 초상화는 여전히 어려운 그림입니다. 제 작품들은 제 카카오스토리(jubi0070)를 방문하시면 언제든 보실 수 있어요. ‘카스’는 제 유일한 온라인 소통 창구인 셈이죠.”

고려 현종과 아버지 왕욱(王郁)의 스토리텔링 벽화를 그리고 있는 안우홍 화백. 해당 벽화는 사천시가 사주(泗州, 사천의 옛 이름) 승격 1000년을 맞아 2015년 6월부터 추진한 고려 8대 현종 ‘부자(父子) 상봉길’ 조성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안우홍 화백의 친형은 말을 타는 사람이다.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승마선수단 코치 A씨. 그가 바로 안 화백의 형이다. 그런 두 사람에겐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있다. 어린 시절 어느 날, 진주 진양호에 있던 승마장에 형제가 우유 하나 빵 하나를 들고 말을 구경하러 갔다. 가서 말에게 먹이를 주는데 갑자기 말 주인이 나타나 채찍으로 형제를 때리기 시작한다. 말에게 함부로 먹이를 줬다는 게 이유였다. 형제는 서럽게 울었다. 소나기가 내렸고 둘은 진양호 선착장 옆에서 비를 피했다. 갑작스런 비에 사람들이 흩어졌다. 안 화백은 형과 서럽게 울면서 눈물 젖은 빵과 우유를 먹었다. 그러다 형과 가위바위보를 했다. 형제가 함께 좋아했던 말과 그림 중 각자 하나만 선택하기를 전제한 가위바위보였다.

“사실 미술에는 형님이 더 재능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형이 말을 선택한 거죠. 저도 이겼다면 말을 택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 집은 말도 탈 수 없었고 그림도 그릴 수 없는 가정환경이었죠. 그냥 둘 다 한국 최고가 돼보자고 했던 것 같습니다. 형은 고향을 떠나 가출해서 3년 동안 마굿간에서 먹고 잤어요. 그러면서 어깨너머로 승마를 배웠고 결국 한국 최고 승마인이 됐습니다. 형은 오직 실력으로 아시안게임 코치까지 갔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독학으로 독하게 한 우물을 팠어요.”

직접 작업한 프레디 머큐리 벽화 앞에서.
안 화백이 오드리 헵번과 찰리 채플린 벽화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안 화백이 그린 '대형' 찰리 채플린 벽화. 진주시 판문동에 가면 볼 수 있다.
대중음악의 상징 비틀즈와 할리우드의 상징 마릴린 먼로. 안 화백의 대표작들이다.

아직 미혼인 안 화백의 별명은 ‘하너’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초등학교 은사님이 지어주신 것이란다. 그런 안우홍 화백은 "내 손이 부지런하다면 그 속에서 많은 것이 흘러넘쳐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코리타 켄트가 한 "순간을 사랑하라, 그러면 그 순간의 에너지가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퍼져 나갈 것이다"도 좋아하는 말이라고 했다. '성실'과 '순간'의 에너지에 빠져드는 것. 그림으로 삶의 정점에 이른 사람이 건네는 묵직한 인생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전 완성이란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아니, 완성이란 없다고 봅니다. 내가 완성이라 생각하는 것이 눈이 더 높은 사람에겐 미흡하게 보일 수도 있거든요. 전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완성했다는 말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 조심스러운 말이기 때문입니다."

글·인터뷰 김성대 기자 / 그림·사진 안우홍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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