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목공예가, 산청 '웅석공방' 김동귀 교수
세계적인 목공예가, 산청 '웅석공방' 김동귀 교수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4.1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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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출신...어린시절 외가 영향으로 목공예접해
1990년도 공방의 효시 된 웅석공방 산청에차려
2012년 경남 무형문화재 상감기법 보유자 지정
색동목브랜드화,세계 미술관·박물관 진출이목표
산청 웅석공방에서 미디어팜과 인터뷰 중인 김동귀 교수.(사진 왼쪽) 

소목장 김동귀 교수는 목상감기법을 활용한 전통 목가구 제작기술의 탁월함을 인정받아 2012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목상감)으로 지정됐다. 어린 시절 진주에서 농방을 운영하던 외가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목공예를 접한 그는 하영길로부턴 전통가구 제작기법을, 강필두에겐 소목가구 제작기법(죽장공예, 화각공예, 목상감, 장석에 관한 제작기능과 자료 등)을 전수받아 공예품을 제작, 각종 공모전에 출품해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한때 초등학교 교사였던 김 교수는 1987년 진주로 근무지를 옮겨 외삼촌들께 13년간 배운 기술로 제작한 전통가구를 가야화랑에 전시하며 첫 개인전을 열고, 이후 지리산 웅석봉 인근에 웅석공방을 설립해 독자적인 공예가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목공예에 관한 체계적인 공부를 위해 늦게 진학한 대학원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소목장으로 지정되어 있던 천상원, 송추만, 정돈산, 강대규에 대한 기능을 비교 연구했다. 또한 진주, 통영, 나주, 서울, 전주 등 각 지역 소목장들을 조사하고 연구하며 기능을 익혔다. 이러한 연구와 훈련 덕에 그의 목가구는 지역 편향성을 지양한 다채로운 특색을 갖게 됐고, 특히 목상감 분야 연구를 통해 전통목가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부분은 그가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목상감 기법과 전통 오방색을 쓴 색동목으로 전통가구를 현대로 이끈 그는 우리 전통목공예의 우수성을 독일, 브라질, 일본 등 해외 10여 차례 개인전을 통해 널리 알렸다. 정교하고 작업이 복잡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상감기법의 대중화를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인 김 교수는 현재 국립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인테리어재료공학과에서 후학들에게 전통 목가구 관련 전통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목상감 기법의 1인자' 김동귀 교수의 작업 모습. 사진=김동귀 제공.

▲외조부부터 외숙부까지 진주에서 농방을 운영해 외가를 드나들며 자연스레 소목 세계를 접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어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놀이터가 따로 없었다. 농방이 곧 놀이터였다. 형제들이 많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 진주기계공업고등학교엘 진학했지만 적응이 잘 안 됐다. 미술교육 중엔 목판화를 전공했는데 어느날 등산 가서 마주한 기념품들을 보고 그냥 내가 만들어 선물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이때부터 목판화에서 공예로 전환해 지역 특성에 맞는 기념물들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1976년도에 첫 작품을 출품해 도에서 우수상을 수상, 지금까지 45년을 이어왔다.

▲고등학교 때 경남공예품경진대회에 작품을 출품할 정도로 목공예에 대한 관심은 이미 높았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정작 진로는 진주교육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해 초등학교 교사직을 택했다. 물론 지금도 대학에서 교육자로 활동 중이다.

대학 졸업 후 10년 정도 됐을 때 강의 요청을 받았다. 나는 그동안 작품 경력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3년 정도 강의를 했는데 깨달은 것이 손끝 재주만으로는 후배들에게 부끄럽고, 뭔가 나만의 학문 체계를 이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흔 넘어 동아대학교에 가 대학원 전공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때가 90년대였는데, 90~99년도 사이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작품을 10차례 내 10번 상을 다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저 나름은 전통가구를 하다 현대화로 돌아서던 시기로, 95년도엔 대상도 받았다. 대상은 한 해 쉬고 다시 저에게로 왔는데 같은 상을 두 번 못 받는다는 주최 측 규정으로 다른 분께 돌아갔었다. 아마 통영 나전칠기 종사자 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화각공예(우리나라 고유의 목칠공예 장식기법의 하나. 나전칠기와 함께 전승돼 온 우리나라의 특색있는 공예의장이다. 투명한 쇠뿔을 종잇장처럼 얇게 편 뒤 오색 안료를 사용해 문양을 그리는 이면 채색방법-편집자주)를 독학으로 익히신 걸로 안다.

인도와 중국은 상아나 거북껍질을 상감 재료로 쓴다. 그러나 한국은 상아도 거북도 귀하다. 이걸 대신할 수 있는 재료가 필요했다. 공예라는 건 결국 재료나 소재로 발전할 수 밖에 없는데 이렇다 할 문헌 자료가 없으니 골동품 가게를 이잡듯 뒤지거나, 외가에 가 물어서 정보를 얻어 작업을 해나갔다. 뿔을 삶아 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각공예는 시행착오를 많이 겪을 수 밖에 없다. 소가 일주일에 3~5마리도 소비가 안 되던 60년대엔 주말마다 밀양 정육점들을 다니며 쇠뿔을 수거해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화각공예를 곧 그만두게 되는데 이유는 애기장 하나를 만들려면 소가 20~30마리나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왕가 옹주들의 반짇고리 치장 분량 밖에 안 됐다. 왕가가 아니면 불가능하단 얘기다. 화각공예의 일반화는 멀어보였다. 나에게 가장 맞는 코드는 나무였다.

산청 웅석공방 입구 전경. 웅석공방은 대한민국 '공방의 효시'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사진=김성대 기자.

▲이곳 웅석공방은 1990년도에 차린 곳이다. 왜 산청이었나.

웅석공방은 88년도에 중소기업청에서 공예산업 현대화의 일환으로 나무, 금속, 섬유, 도자 등 영역별로 두 사람씩 총 10명이 일본 현지에 가 그 나라 전통 공예의 전 영역을 돌아보고 와서 세미나를 열며 출발했다. 60년대엔 도자나 금속, 섬유는 공방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나무는 목공소 수준을 못 벗어났다. 이에 나무도 외국처럼 공방시스템을 도입해야 하지 않나 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그렇다면 누가 그 일을 할 거냐는 고민이 있었다. 사실 나는 87년도에 진주시 상봉동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방시스템과 관련한 일련의 생각 끝에 외국 작가 등 국제 교류 측면에서 교통이 용이한 지역에 공방을 차려야 하는 당위가 생겼다. 적어도 공항에서 1시간 이내 거리에 공방을 지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알맞은 자리를 찾아 사천, 하동, 남해 등 여러 지역을 다녀봤지만 지리산 인근만한 곳이 없었다. 일단 물이 깨끗했고, 빨치산의 마지막 무대라는 역사적 의미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웅석봉은 지리산의 마지막 봉우리였다. 이곳 계곡은 지리산 계곡들 중 가장 짧은 계곡인데, 계곡이 짧다는 건 가장 덜 오염됐다는 말과 같다. 그렇게 30년 전만 해도 생각지도 못할 시스템을 이곳에 도입하게 된다. 골목 공방이었지만 이게 효시가 돼서 전국 교수들이 자신의 공방들을 가지게 됐다. 홍익대 대학원생들이 5년간 워크숍을 갖는 등 이곳에서 집중 강의도 하곤 했다. 한국의 웬만한 목공예가들이 여기서 과정을 밟았다. 웅석공방은 공방의 시발점 같은 곳이다.

▲비슷한 무렵 부산 동아대학교 대학원에서 목칠공예 공부를 시작했다. 거기서 천상원, 송추만, 정돈산, 강대규의 작업과정을 비교 연구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저 네 사람은 교수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네 사람을 연구해야 내가 갈 방향이 설정될 것이었다. 그분들이 썼던 최고급 기법이 바로 목상감 기법이었는데, 자신들만의 패턴을 가진 그 분들의 작업에서 피드백을 얻었다. 그러면서 나도 내 빛깔을 낼 수 있는 걸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학위 논문을 쓰면서 상감기법을 연구했다. 특히 일본과 유럽을 조사하며 나무를 기하학적으로 엮는, 다소 기계적인 맛을 내는 기법을 접했는데 나는 그런 기계적인 것에서 자연스러운 작업을 끌어내는 데 더 주목했다. 마치 나이테처럼 나무를 곡선으로 빼낼 순 없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소나기를 피하려 둘러썼다 던져둔 신문지가 쪼글쪼글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봤다. 저거다, 저걸 응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무도 섬유니까 열과 습도에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는 회귀 성질을 가지고 있을 거라 봤다. 산허리를 자르면 드러나는 지층의 배사 구조. 거기엔 사암, 역암, 이암이 섞여 있다. 그것처럼 나무도 서로 다른 재질들을 섞으면 색동옷 마냥 다양한 패턴을 끌어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데까지 생각이 뻗쳤다. 꼭 먹물로만 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천연염료로 나무에 염색을 해도 됐다. 물론 천연염료는 햇빛을 받으면 증발하기 때문에 안정성이 없었다. 그래서 산성염료 쪽으로 간 것이고 그렇게 안정성을 확보했다. 실제 그런 방법으로 만든 작품은 30년이 넘어도 변함이 없다. 아마 컬러 목재로 벤딩한 가구는 제 것이 세계에서 유일할 것이다.

▲2012년 경남 무형문화재 상감기법 보유자에 지정됐다. 어떤 과정을 거쳐 지정된 것인가. 

2007년도에 폐, 편도 종양을 떼 내는 수술을 했다. 보름 만에 두 가지 수술을 한 거다. 3년 뒤 창원에서 전시를 했고 찾아온 지인 분들이 제 건강을 염려하며 “김 선생이 다시 병원에 실려 가면 후배들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도권 내에서 계속 이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강단에선 단편적인 거고, 국가적 차원에서 이어가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씀들을 해주셨다. 이것이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게 된 배경이다.

웅석공방에 소장 중인 김동귀 교수의 작품들. 사진=김성대 기자.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는 작업은.

색동목 블럭 작업이 가장 길다. 한 작업에 20년 가까이 끌고 온 부분도 있을 정도니까. 무엇보다 목수는 나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외피를 보고 나무 속 무늬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 거다 염두에 두고 톱질을 하는 거다. 톱질 한 번, 판단 한 번 잘못 하면 나무가 가진 500년 역사가 사라질 수 있다. 나무의 무늬가 좋다는 건 많이 뒤틀렸다는 것인데, 그걸 더 뒤틀리지 않게끔 잡아줘야 하는 것도 목공예가의 몫이다. 뒤집고 햇볕을 쏘이고 나무를 순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실 목공예에서 사람 손은 20% 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자연에 맡긴다. 자연의 순리대로, 우린 그저 자연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일 뿐이다.

▲차와 관련된 작품들이 종종 눈에 띈다. 실제 차를 즐기나.

고 아인 박종한 선생님이 중학교 은사셨다. 대학 다닐 때 아인 선생님이 소장하셨던 민속품을 통해 골동품을 많이 접했다. 언젠가 일본 고베에서 개인전을 연 적이 있는데 나무로 된 차 그릇을 전시했었다. 일본은 생활도구에 목기를 많이 쓰는 나라지만, 차 그릇은 도자 아니면 금속을 주로 쓴다. 그런 그들에게 소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트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들의 반응은 상당했다. "문화적으로 각성하게 된 계기였다"고 말해준 사람도 있었다.

김동귀 교수가 제작한 2019년 설화수 진설 명작세트 컬렉션 '색동목장'. 화장품 브랜드 설화수가 외국 VIP들을 위해 만든 이 장을 가진 국내인은 10명 밖에 없다고 한다. 사진=김성대 기자.
30년 웅석공방 역사가 오롯이 담긴 공구들. 사진=김성대 기자.
일본 고베 개인전에서 선보인 나무 다구들. 일본인들의 반응이 상당했다고 한다. 사진=김성대 기자.
김 교수는 색동목과 최첨단 산업을 연계한 브랜드를 만드는 게 향후 목표라고 했다. 사진=김성대 기자.

 

▲앞으로 계획 또는 목표가 있다면.

앞으로 제가 작가로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은 10년 남짓일 것 같다. 보름 동안 두 차례 수술을 겪은 만큼 남은 시간은 덤으로 사는 시간, 저질러 놓은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기회가 된다면 해외 미술관 및 박물관 100군데 정도에 제 작품을 두고 싶다. 그러면 사람들이 김동귀의 족적이라도 한 번 훑어볼 수 있지 않겠나. 내 냄새가 나는, 내 빛깔이 나는 작업들을 해서 먼 나라에 보낼 수 있는 기회만 되어도 저는 족하다. 그리고 색동목을 정리하는 단계를 지나 주얼리나 건축 소재 등 최첨단 산업 쪽 브랜드를 만드는 일도 고민 중이다. 전통에 머물 것인가, 그것을 계승 발전시킬 것인가를 늘 생각한다. 시대 상황은 항상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김성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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