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담론을 전국의 담론으로” 호밀밭 출판사 장현정 대표
“지역의 담론을 전국의 담론으로” 호밀밭 출판사 장현정 대표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2.28 05: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98년 데뷔 록밴드 ‘앤’ 보컬 출신
2008년 박사과정 후 호밀밭열어
좋은책 쓰고 좋은책 내는게 목표

부산에 있는 출판사 호밀밭의 장현정 대표는 1998년도에 데뷔작을 발매한 록밴드 앤(Ann)의 보컬이었다. 이른바 ‘인디 1세대 밴드’였던 앤은 2010년에 데뷔 10주년 기념 EP [기쁜열대]를 내고 6개월 정도 활동을 재개했다 결국 잠정 해체했다. 홀로 부산에 내려온 장 대표를 뺀 앤의 나머지 멤버들은 지금도 드라마, 영화음악을 하며 뮤지션으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장현정 대표는 한때 영화 시나리오와 연극 대본을 쓴 적이 있고, 진주MBC(현 경남MBC) <오후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장현정의 록킹 위크엔드’를 맡아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책을 소개하는 KNN 주말 라디오 프로그램을 4년째 진행하고 있으며, KBS1TV 시사교양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면서 방송과 연을 맺고 있다.

2011년 장 대표는 부산 청년 예술가들과 함께 부산 일대를 청년 문화 수도로 만들고자 한 프로젝트에 문화기획자로서 참여한 적이 있다. 그 프로젝트는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하나의 콘셉트 아래 모아 일을 만들어본 뒤 해체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경험은 호밀밭 뿐 아니라 스튜디오, 서점, 카페가 함께 있는 광안리 ‘생각하는 바다’라는 공간에 그대로 응용됐다. 생각하는 바다가 주로 바라보는 곳은 청년문화, 비주류문화, 문화다양성 쪽이다. 장 대표의 이러한 성향은 출판사 운영과 4년 정도 병행한 사회적 기업 활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부산엔 한때 <안녕 광안리>라는 잡지가 있었다. 외지 사람들이 사랑하는 광안리, 광안리에 직접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광안리 사랑이 잡지 발간으로까지 이어졌다. 장현정 대표는 바로 이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안녕 광안리>는 초창기 멤버 7명이 자비로 만들었다. 하다가 멤버들이 모두 바빠지면서 잡지는 자연스레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려주자니 광안리에서 찾아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잡지는 꽤 좋은 반응을 얻어 ‘안녕 금정구’ ‘안녕 해운대’를 만들어달라는 요청까지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멤버들은 특정 동네는 그 동네에 사는 분들이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거절했다. 잡지 제작 시스템과 노하우, 과정은 알려줄 수 있어도 자신들이 만드는 건 아닌 것 같았다는 게 장 대표를 비롯한 <안녕 광안리> 편집진의 생각이었다.

음악, 시나리오와 극본, 방송, 사회적기업, 문화기획, 강연, 출판. 못 하는 것 빼곤 다 할 줄 아는 팔방미인 장현정 호밀밭 대표를 부산 광안리에서 만났다.

 

부산 광안리에 있는 출판사 호밀밭의 장현정 대표. 호밀밭이 있는 '생각하는 바다'라는 공간은 이처럼 타 출판사 책들도 만날 수 있는 서점도 구비하고 있다. 사진=김성대 기자.

퀸을 듣고 빠진 음악

장현정 대표는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부산 광안리에는 초등학교 때 왔다. 80년 5·18민주화운동 때 광주에 있었던 장 대표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당시 정권 아래 광주는 아이들 교육 환경을 위협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광주를 떠났다. 장 대표의 가족도 81년도에 부산으로 왔다. 부친이 무등 경기장에 자주 데려가준 어린 시절 그는 야구를 좋아했다. 특히 해태의 광팬이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해태의 전성기적 선수 명단을 그는 지금도 외고 있었다. 1번 김일권, 2번 서정환, 3번 김성한, 4번 김봉연, 5번 김종모, 6번 차영화. 그는 야구 외 축구, 농구 등 웬만한 구기 종목도 다 좋아했다. 특히 마이클 조던 붐이 일었던 90년대 초중반엔 길거리 농구도 즐겨했다. 그가 음악에 눈을 뜬 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였다.

“광주비엔날레에도 나갔던 홍석진 감독이라고, 중학교 1학년 때 친구인데 지금도 자주 만나는 친구예요. 어릴 때 3년 정도 영국에 살다온 그 친구가 어느날 영국에서 유명한 밴드라며 테이프 두 개를 줬어요. 바로 퀸과 비틀즈였죠. 그 중 처음 들은 게 퀸이었는데 다름 아닌 ‘보헤미안 랩소디’가 수록된 [어 나이트 앳 더 오페라]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외국 문물을 접하기 힘든 때였죠. 누나가 즐겨 듣던 이선희, 이문세 정도가 고작이었던 시절, 퀸을 듣고 완전히 신세계로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그 친구에게 다른 거 없냐 물어 헬로윈도 듣고 음악 듣는 귀를 조금씩 넓혀갔습니다.”

장 대표는 고등학교 때 하늘소라는 스쿨밴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본 조비나 펑크(Punk)를 하고 싶었던 그와 다른 멤버들 의견이 맞지 않아 장 대표는 동천고등학교의 한가람, 남일고등학교의 하얀종이 멤버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든 밴드가 바로 앤이었다.

1998년 발매한 앤(Ann)의 데뷔작 [Skinny Ann's Skinny Funky]. 당시 평단에서 선정한 '대한민국 대중음악사 100대 명반' 88위에 올랐던 작품이다.
1998년 발매한 앤(Ann)의 데뷔작 [Skinny Ann's Skinny Funky]. 당시 평단에서 선정한 '대한민국 대중음악사 100대 명반' 88위에 올랐던 작품이다. 사진=매니아디비 제공.

“그 시절 또래 아이들이 모두 밴드 음악을 하고 싶어했을 때 혼자 음악을 한 친구가 루시드 폴 윤석이구요, 하얀종이에서 기타 치던 친구가 캐스커 이준호였습니다. 또 동래에 살던 1살 어린 친구들이 당시 우리 연습실에 자주 출입을 했었는데 그들이 바로 피아 멤버들이었죠.”

장 대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대에 들어갔다. 4년제 대학만 가라, 그 뒤론 네가 알아서 살라시던 부친의 말씀을 따른 뒤 그는 곧바로 학교를 그만 둔다. 아버지와 약속은 지켰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밴드 생활을 계속 했다. 이름은 커팅 클래스. 자신을 뺀 다른 멤버들, 그러니까 동천고와 남일고 친구들이 모두 학교를 그만둔 이유로 지은 이름이었다. 한 외국인이 밴드 이름이 멋있다며 칭찬했는데 ‘커팅 클래스(Cutting Class)’는 알고 보니 ‘계급 타파’라는 뜻이었다.

“밴드 노이즈가든이 활동하던 신촌의 모 클럽에서 오디션을 보고 부산에 오니까 영장이 와 있었어요. 나는 기왕 가는 거 빨리 갔다 오고 싶었고 멤버들은 안 갈 줄 알았죠. 결국 가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군 복무를 한 2년 사이 밴드 이름이 앤으로 바뀌었고 멤버도 바뀌어요. 제대 7개월 전, 기타 치던 성훈이라는 친구가 테이프에 기타 리프를 스케치해 보내오면 강원도 홍천에 있던 제가 가사와 보컬멜로디를 붙이는 식으로 곡 작업을 했습니다. 97년 4월 제대 하자마자 인제대 밴드연습실에서 한 달간 먹고 자며 합숙을 했고, 그해 5월 다시 서울로 갔죠. 한 연말 시연회에서 참가한 8팀 중 한 팀에 선정되고, 이듬해인 98년 첫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프로 밴드 생활을 시작한 1년 여 뒤 장 대표는 이 일을 평생 하진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20대 초반이던 그의 눈에 인디 신의 생리는 마냥 장밋빛이 아니었고, 어른들이 밴드들을 어떻게 착취하는지도 그의 눈엔 다 보였다. 장 대표에게 부담스러웠던 건 음악이 아닌, 그걸 둘러싼 환경이었다. 그는 작곡을 하던 대본을 쓰던 무대 밑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호밀밭 출판사가 있는 광안리 문화공간 '생각하는 바다' 내부 모습. 사진=김성대 기자.

'안녕, 광안리' 음악에서 책으로

장 대표는 다시 부산으로 왔다. 평생 하려던 음악을 안 한다고 생각하니 공허했다. 그 공허한 마음을 달래준 건 다름 아닌 책이었다. 홍대에서 음악 할 때도 책은 많이 읽는 편이었지만 광안리로 온 그는 작심하고 수영구도서관에 틀어박혀 하루 4~5시간씩 독서를 했다. 그는 계통 없이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지식을 습득하는 재미가 생겼다. 그리고 습득한 지식의 계통을 잡고 싶어졌다. 제대로 공부를 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이후 3개월 동안, 장 대표는 살아오면서 가장 열심히 공부 한 끝에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2008년. 박사 과정까지 마친 장 대표는 ‘읽고 쓰는 일을 계속 할 거라면 출판사를 가지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호밀밭을 열었다. ‘호밀밭’은 미국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1951년 작품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실 장 대표는 서울 모 출판사에서 이미 책을 한 권 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20대 나이에 딱히 유명하지도 않은 지방 사람의 책에 책을 쓴 사람의 의견이 반영될 여지는 적었다. 내 책이 내 책 같지가 않았다. 독립 음반 제작을 해봤으니 그 메커니즘을 출판에도 적용할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장 대표는 인생 모험 대상을 음악에서 책으로 바꾸게 된다.

“내가 왜 서울로 갔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지방에서도 곡을 쓰고 공연은 할 수 있는데 앨범을 내려면 서울로 가야했던 거였어요. 지역에선 순환 고리 중 늘 하나가 빠져 있었던 겁니다. 글을 쓸 수는 있는데 책을 내려면 서울로 가야하는 거죠. 이걸 지방에서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알리는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여태껏 부산, 경남 지역엔 작가는 있지만 제대로 된 회사(출판사)는 없었거든요. 사실 작년엔 수도권 작가들도 저희 출판사로 접촉을 해왔습니다. 전 저희처럼 작은 출판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습니다. 얼마 전 강연을 들었던 교보문고 류영호 차장이 말한 것처럼 큰 출판사들이 자갈이라면 그 틈을 우리 같은 모래들이 채우면서 가는 거죠.”

장 대표는 언젠가 ‘지식식민성’이라는 말을 했다. 세계 담론을 주도하는 영미권의 수많은 번역서들이 한국에서 어색하게 이식되고 있는 현실을 꼬집은 말이다. 기자는 그 말을 ‘지역식민성’이라 바꿔말해볼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물었다. 한국은 기형적으로 중앙 집중 현상이 심하고, 지방은 고작해야 수도권을 서포트한다는 뜻에서다. 담론이나 지식도 마찬가지다. 출판이라는 건 국가가 아닌 도시와 함께 성장한 것임에도 한국에선 지역이 담론을 이끌어 가는 경우가 잘 없다. 장 대표는 바로 이 ‘로컬 담론’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일을 주도하려는 생각에서 출판사를 차렸다.

장현정 대표가 편집장을 맡았던 지역잡지 <안녕 광안리> 표지들.

"3월 말에 원자력 관련 번역서가 나옵니다. 일본 최초로 원자력이 들어간 도카이라는 마을을 아사히 신문사가 40년 동안 르포 형식으로 다룬 내용인데요. 한국의 경우 이런 원자력 담론은 부산이 주도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수도권 쪽 사람들은 원자력이 자신들의 문제라고 잘 생각하지 않는 거죠. 반면, 부산과 울산은 고리 원자력 발전소와 지척이어서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부산은 또한 일본 원전과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이기도 해요. 이처럼 수도권이 놓치고 있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보지만 지역이 주도해나갈 수 있는, 또는 해나가야 하는 담론들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부산 입장에선 그게 바로 원전인 거구요. 또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인 걸 감안해 부산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다섯 인물을 다루는 책도 시리즈로 선보일 예정인데, 상해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왔던 <박재혁>이란 인물의 책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당시엔 유관순, 안중근 같은 분들만 있었던 건 아니거든요. 이렇게 지역에서 출발하되 전국적, 세계적으로 담론을 주도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계속 내는 것이 호밀밭의 목표이자 비전입니다.”

호밀밭의 단행본은 지난해 연말 기준 100종을 넘겼다. 장 대표가 집필한 <소년의 철학>을 첫 책으로 맨땅에 헤딩 하듯 시작해 10년을 달려왔다. 처음엔 인쇄소에 가 야단도 맞고 유통 방법을 잘 몰라 예스24, 알라딘 같은 인터넷서점 담당자들과 만나 수업 듣듯 업계 생리도 배웠다. 그러다 창원대학교 이성철 교수(사회학과)가 쓴 <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 같은 책도 내면서 <시사인>으로부터 "책 제목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는 호평도 들었다. 장 대표는 지난해 발간한 프랑스 번역서 <못 생긴 여자의 역사>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태껏 시도한 대여섯 차례 번역서 발간이 엎어진 끝에 이룬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인터뷰집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 않았던 걸 시도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그는 말했다.

“1인 출판사를 6년 동안 해왔어요. 직원을 고용한 건 4년 정도 됐구요. 서로의 업무를 잘 모를 때 전체를 연결해 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그리고 책임. 결재를 한다는 건 내가 책임지겠다는 뜻이거든요. 대표로선 그 역할이 제일 크다고 봅니다. 전 지금도 인쇄 들어가기 직전 최종 파일을 직접 다 살핍니다. 숫자가 틀린 건 없는지, 목차 페이지와 본문 페이지가 잘 맞는지. 이런 것들이 틀리면 심각한 일이 생기거든요. 어떻게든 사고가 나지 않도록 제가 마지막까지 보고 사고가 나면 제가 책임지는 것. 대표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장현정 대표가 집필한 호밀밭의 첫 책 '소년의 철학' 표지.
장현정 대표가 집필한 호밀밭의 첫 책 '소년의 철학' 표지.

유튜브, 페이스북보다 재밌는 책 만들어야

지난 1월 호밀밭은 큰 난관에 부딪혔다. 호밀밭에서 발간한, 세월호 참사를 다룬 강동수 작가의 소설 <언더 더 씨>에서 희생자를 '성적 대상화' 했다는 비난이 일어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이다. '검열이나 비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상상하고 글 쓰는 공간'이라는 호밀밭 출판사의 모토와 별개로 <언더 더 씨>의 파장은 컸다. 그것은 표현의 클리셰, 올드하거나 진부한 표현 정도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근래에 와 부쩍 성장해버린 한국 대중의 젠더감수성이었다.

“예민하고 민감한 지금 시대 젠더감수성은 그런 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필터링을 제대로 못한 출판사 대표 입장에서 매우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혹시 우리도 옛날 마인드로 책을 기획하고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반성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저희 입장에선 좋은 공부가 된 일이었습니다.”

장 대표는 비록 음악을 하고 있진 않지만 음악을 듣는 일은 여전히 즐긴다. 패신저스의 'Let Her Go'와 존 메이어의 깔끔한 블루스 기타를 편애하는 그는 한국 인디밴드들 앨범들은 거의 다 챙겨듣는다. 최근엔 데뷔 40주년을 맞은 정태춘 씨 관련 책에도 글 한 편을 기고했다. 사실 음악은 그를 떠난 듯 보였지만 음악은 늘 그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책을 소개하는 라디오 방송에서도 책과 어울리는 음악들을 선곡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뮤지션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장 대표는 회사가 안정되면 1년 정도 음악만 해보고 싶다고도 했다. 근 20년 만에 아내와 공연을 함께 하면서 1, 2곡 정도 곡 작업을 해볼까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그에게 '책의 미래'를 물었다. 더 정확한 질문은 책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였다.

“자동차가 발명됐을 때 기차가 없어질 거라 했고, 에디슨이 레코드를 발명했을 때 공연이 사라질 거라고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 전자책의 미래도 밝게 보지 않는 것이, 책은 질감과 냄새 등 오감으로 읽는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 출판인들이 좀 더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봅니다. 유튜브나 카카오, 페이스북보다 더 재밌는 콘텐츠를 책으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죠. 옛날처럼 일방적으로 내 얘기를 들어라가 아니라 좋은 지식, 원고가 있으면 어떻게 잘 쪼개서 독자들에게 먹일 것인가 즉, 이제는 가공의 기술을 고민할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SNS를 하는 사람들은 짧은 호흡에 익숙합니다.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이 책은 장편은 아니고 단편 치곤 길고, 말하자면 중편에 가까운 작품이었습니다. 예전엔 그 정도 분량은 단행본으로 내지 않았죠. 보통은 소설집에 묶이는 분량인데, 이처럼 중편에 가까운 책이 단일화 된 책으로 나온다는 건 출판인들이 주목해야 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장현정 대표는 출판사 대표이기 전에 본인이 직접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한 달에 한 권에서 두 권 정도 책을 내는 출판사. 그 출판사를 안정적인 구조로 이끌어 편집자, 디자이너가 자기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드는 게 대표로서 목표라면 작가로서 그의 개인 목표는 당연히 좋은 책을 쓰는 일이다.

“작년에 내려고 했던 책이 좀 미뤄지고 있어요. 좋은 책을 쓰고 싶습니다. 그게 항상 숙제처럼 마음에 무겁게 남아있네요.”

김성대 기자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