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최초 상영은 언제부터일까에 대한 논란은 많다. 즉 최초의 동영상 기기가 만들어진 때인가, 아니면 동영상의 발명자가 연구실이나 실험실에서 혼자 상영한 것이 최초인가 등의 논란이 그것이다. 그러나 영화사에서 공통적으로 합의하는 것은 관객들을 대상으로 공개된 장소에서 입장료를 받고 상영한 사례가 영화의 첫출발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가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들이다. 이들은 1895년 3월, 자신들의 새로운 발명품(시네마토그라프)을 가지고 영화들을 만들어 카페에서 유료로 공개 상영하기에 이른다. 영화의 첫걸음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한국에서의 영화상영의 첫걸음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여러 논란 끝에 실증적인 사료의 보완 등으로 1897년 10월 10일 내외인 것으로 확인된다. 비록 그 영화는 활동사진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프랑스에서 첫 영화상영이 있고난 후 불과 2년여 만에 조선에서 영화상영의 첫걸음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22년 후 조선인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가 단성사 무대에 오른다. 김도산 연출의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1919년 10월 27일)가 그것이다. 비록 이 작품은 연쇄극(Kino Drama)의 형태였지만 당시 대중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다. 참고로 연쇄극은 (연극) 무대에서 어떤 장면을 공연하던 중 (옥양목으로 된) 영사막이 무대 위에서 내려와 설치되고 일부 장면이 영사되다가 다시 실제 무대공연으로 돌아가는 형태를 띤 극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쇄극이라 할지라도 화면에 단순한 배경만 영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실제 연기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이후 한국영화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등의 과정을 거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대중들의 일상문화에 스며들게 된다.
그런데 외국자본에 의한 최초의 영화 상영(영국계 자본인 조선연초주식회사에 의한 최초의 활동사진 상영을 말함)과 이에 뒤따르는 일제 강점기간 동안의 영화 역사의 서술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찾아볼 수 있다. 즉 한국영화사를 일별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나타난다. 먼저 최초의 한국영화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는 일정한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즉 대한제국 초기부터 한일 합방 이후까지 국내에 머물며 영국 공사관의 법무사를 지낸 에스터 하우스(Astor House)가 런던 타임즈에 기고한 기사(1897. 10. 19)에서 1897년 10월 상순경 조선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되었다는 사료가 발굴됨으로써 그동안 통설이었던 1903년 보다 5년 앞당겨지게 되었다. 둘째, 일제강점기에 대한 영화사는 어느 정도 두터운 연구성과들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이를 살피려다보니 특히 카프(KAPF) 소속 영화인들의 작품이나 영화활동 등에 대해서는 그 소개가 소략하거나, 자료의 한계 등으로 연구의 지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에 대한 소개나 연구 자료들이 당시 중앙의 중심적인 인물들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실질적으로는 당시에 유의미한 활동을 펼친 주변적인(?) 영화인들에 대한 기록이나 평가가 매우 일천하다. 이러한 이유는 이들 영화인들 중의 일부가 월북하였거나 사회주의계열의 소재를 다룬 탓에 이들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소개가 자기 검열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이 1920-30년대는 일제 강점하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의 태동기였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카프 소속 영화인들에 대한 평가는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지역의 문화사나 인물 연구에 있어서도 이들에 대한 언급은 다소 불확실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거나 또는 매우 단편적인 언급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하 지역의 영화인에 대한 이상과 같은 문제점들은 1920-30년대 카프 영화부 소속으로 많은 활동을 펼친 경남 마산 합포구 진전면 봉곡리 출신의 강호(姜湖) 감독의 경우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강호 감독을 소개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영화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1920-30년대에 집중적으로 활동한 카프 소속 영화인들의 작품과 비평활동 등은 한국영화사에 있어 기술적-내용적 측면에서 새로운 전기를 만든 계기가 되기 때문에, 강호 감독의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지역문화사의 측면에서 강호 감독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그동안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남의 창원에는 1952년부터 미공보원 상남영화제작소가 설치되어 15년 간 활동하면서 초창기 한국영화계의 인력양성과 기술 습득의 역할을 가능케 한 ‘한국영화의 메카’였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배경이 있고, 그리고 마산에서는 1910년 최초의 극장(환서좌)이 설립되는 등, 영화와 관련된 역사가 비교적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활동인물들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매우 일천하기 때문이다. 특히 강호 감독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1920-30년대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강호 감독의 작품 및 비평활동 등을 살펴봄으로써 경남지역의 초창기 영화사에 대한 연구 등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이성철 창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기획 연재 ‘경남지역 영화사’는 책 <경남지역 영화사: 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의 저자 이성철 교수와 출판사 호밀밭의 허락 아래 미디어팜에 게재되는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