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 영화사] 경남 최초의 영화감독, 강호
[경남지역 영화사] 경남 최초의 영화감독, 강호
  • 이성철
  • 승인 2019.06.0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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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화예술협회 시절 모습으로 추정되는 강호 감독. 사진=이성철 제공.
조선영화예술협회 시절 모습으로 추정되는 강호 감독. 사진=이성철 제공.

강호 감독(1908-1984)은 1908년 8월 6일 현재의 통합 창원시 마산구 진전면 봉곡리에서 진주 강씨의 소작농 집안(부 강상형)에서 태어났다(5녀 1남의 막내). 아래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진전면은 당시에도 진주와 마산, 그리고 통영을 잇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강호 감독의 이웃 동네인 오서리에는 카프 소속 문학인이었던 권환(1903-1954)의 생가가 있다. 이 마을에는 안동 권씨의 재실인 경행재가 있는데 여기서 근대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고 한다(1867년 건립). 오서리는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마을 한가운데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맞은편 오서리 옛 장터 뒤에 경행재(景行齋)가 있다. 백 년도 더 된 이 집은 건립 초기엔 문중의 재실 겸 한학을 가르치던 서숙으로 사용되었고, 일제 강점이 시작된 1910년부터는 사립 경행학교로 이용되었다. 경행학교를 설립한 이는 권환 시인의 부친인 권오봉 선생인데, 그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지역의 선각자였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하다 순국한 죽헌 이교재 선생과, 기미년 삼진의거를 이끌었던 백당 권영조 의사 등이 모두 경행학교에서 민족운동의 싹을 틔웠으니, 경행재야말로 이 지역 민족운동의 요람이었다(송창우, 2012). 이장열(2012: 122-123)에 따르면 강호는 어린 시절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고(1915년 무렵, 7세), 이후 호주 선교사가 만든 인근의 “창신학교에 관심을 두고 배움의 길로 나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창신학교는 1906년 5월 성호리 교회당(현 마산 문창교회, 문창교회는 1901년에 설립)내에 ‘독서숙’(讀書塾)이라는 현판을 내걸고 시작되었고, 이는 마산 최초의 민족사학이었다. ‘창신’이라는 이름은 1908년 9월부터 사용되었고, 사립학교령에 의해 정규학교 인가를 받은 것은 1909년 8월 19일이었으며 남녀공학이었다(허정도, http://www.u-story.kr/203을 참고할 것). 그리고 창신학교에는 우리나라 근대 학문의 기초를 마련한 이로 평가받는 안확, 한글학자 주시경의 제자였던 김윤경과 이윤재, 그리고 「허생전」을 베를린에서 최초로 인쇄, 배포하여 조선어를 가르쳤던 이극로 등의 민족교육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차민기, 2003: 123-128). 참고로 1911년 창신학교 학생들은 일본국왕 대정(大正)의 즉위 기념을 명목으로 각급 기관과 학생들이 동원되어 시가행진을 벌일 때, 천황만세를 외칠 것을 주문한 일제에 대해 호응하지 않고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기마경찰과 충돌한 학생들은 이들을 공격하여 자산천(무학초등학교 옆 개울)에 밀어 넣었다(신춘식, 2003: 81-82). 이후 일제의 탄압과 경영난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다가 앞서 언급한 호주 선교부가 1925년 고등과를 인수하여, 마산 최초의 ‘고등보통과정’인 호신학교를 개교(이영옥, 2014: 7-8)하였다.

강호 생가의 약도 및 창신학교(1909년)의 모습. 출처=권환기념사업회(2014)

이후 그는 1920년경 13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 교토로 유학을 떠난다. 이장열(2012: 123)은 이를 1922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강호는 빵집 심부름꾼, 우유 및 신문배달 등으로 교토 중학교를 졸업한 후 교토의 미술전문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게 된다. 생활고뿐만 아니라 관동대지진(1923년) 등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박해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했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강호의 일본 이력에 대해서는 자료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김달진 미술연구소에서는 일본 미술전문학교 전문부를 졸업한 것으로 기록되어있고, 이장열(2012: 123)은 1927년 교토예술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보다 정확한 사실규명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강호 감독은 어릴 적부터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일본으로 건너가 전문적인 수업을 받은 후 서양화가로서 활동하게 되고 이러한 자산은 영화 및 연극에서의 무대미술 분야로 이어진다. 그리고 1931년도에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계급주의 동요집인 「불별」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이장열, 2012: 127).

강호 감독의 유화들. 왼쪽부터 1961년도 <4월의 풍경>, 1967년도 <마당에서>, 1969년도 <자화상>
출처=1961년도는 포털아트 홈페이지(http://www.porart.com), 1967년과 1969년도의 출처는 사진 속에 표기.

한편 강호(姜湖) 감독의 본명은 강윤희(姜潤熙)인데, 그의 별칭은 이외에도 독고성, 그리고 한자 이름을 달리 쓰는 강호(姜虎)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강호(姜湖)이다. 이는 그가 1933년 4월 17일부터 4월 17일까지 8회에 걸쳐 <조선중앙일보>에 쓴 “조선영화운동의 신방침”이라는 영화평론 기사에 등장한 필명에서도 나타나고, 1930년대 그를 소개한 <삼천리>, <동광> 등의 잡지, 그리고 경성지방법원, 종로경찰서 등의 그와 관련된 사찰 자료에서도 이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편 독고성이라는 별칭은 그가 <암로>(1928)를 연출했을 때 사용한 이름이었고, 강호(姜虎)라는 이름은 일제에 저항하며 나약해지지 않고 호랑이처럼 살려는 다짐으로 사용하였다고는 하나 월북 이전에는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장열(2012: 125)은 강호 감독이 <암로>를 연출할 당시 독고성 이외에도 민우양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우양(閔又洋)은 김유영 연출의 <유랑>에서는 편집을, <화륜>(1931)에서는 촬영을 맡았고, 강호 감독이 진주의 남향키네마에서 <암로>를 연출할 때는 촬영과 편집을, 그리고 강호 감독의 <지하촌>(1931)에서는 촬영을 맡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안종화(2002: 429)와 윤기정(2004: 475)도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대 인물이었던 심훈(1931) 역시 당시의 잡지 「동광」에서 민우양이 <화륜>과 <지하촌>을 촬영하였다고 말하고 있고, 1940년에 발행된 「삼천리」 잡지에서도 <암로>의 촬영은 민우양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민우양의 생몰년대나 촬영기사로서의 수련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을 볼 때 1920년대 카프 영화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강옥희 외, 2006: 107-108).

조선중앙일보(1933. 4. 7)에 연재된 강호의 영화운동론.
조선중앙일보(1933. 4. 7)에 연재된 강호의 영화운동론.

강호 감독은 그의 카프 영화활동으로 말미암아 1934년에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영화운동 기관지인「영화의 벗」배포사건에 연루된 일로 이상춘, 추민 등과 함께 피검되었다가 1935년 9월 출소했다. 그리고 공산주의협회자사건(일명 왜관농민야학사건, 1938년)으로 다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942년까지 4년간 복역하게 된다(강옥희 외, 2006: 16-17). 이때는 중일전쟁기간 전후이기도 했다(1937년~). 출감이후 1943년부터는 조선연극동맹에 참여하여 영화계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연극분야의 무대미술이었다. 1946년 이후의 행적은 그의 월북으로 말미암아 충분한 소개를 할 수 없다. 북한에서 그는 여러 영화들의 무대미술부문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장편소설의 삽화 등을 그렸으며 평양미술대학 영화 및 무대미술 강좌장과 예술학 부교수 등의 경력을 이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영화 및 무대미술에 관한 두 권의 저작물도 출간하였다고 한다(「해방 전 우리나라 살림집과 생활양식」, 「해방 전 우리나라 옷 양식」).

글 / 이성철 창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기획 연재 ‘경남지역 영화사’는 책 <경남지역 영화사: 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의 저자 이성철 교수와 출판사 호밀밭의 허락 아래 미디어팜에 게재되는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