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과 힙합의 상생을 꿈꾸다" 의령군 연희공간 '천율' 송진호 대표
"국악과 힙합의 상생을 꿈꾸다" 의령군 연희공간 '천율' 송진호 대표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3.26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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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패 고 송철수 명인 손자
2018년 대한민국 인재상 수상
힙합과 국악 장르배합에 관심
'천율'국악의 성균관 만들고파
의령 연희공간 '천율'의 송진호 대표. 의령 집돌금 농악보존회 예술감독인 그는 지난해 11월 대한민국 인재상을 수상했다. 연습실 벽에 액자로 걸린 '천율(天律)'이라는 이름은 송 대표가 군악대 복무 시절 만난 한 스님이 지어준 것이고, 글씨는 그 절의 의령 출신 신도가 써준 것이다. 사진=김성대 기자.

 

집돌금은 경남 의령군을 대표하는 농악이다. 원시 사회에서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신성시 해 형성되는 종교 및 사회 체제인 '토테미즘'과 신적인 존재를 불러들이는 샤먼(shaman=무당)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인 '샤머니즘'의 변천사를 함께 담고 있는 집돌금은 그러나 일제 침략과 민족문화말살 정책으로 많은 부분이 사라지거나 잊혀졌다. 의령 지역 고유의 농악과 지신밟기 행사로 1980년대까지 이어진 집돌금은 그간 전수자가 없어 맥이 끊겼다가 지난 2015년 2월부터 보존회를 중심으로 복원되기 시작했다. 의령 연희공간 '천율'의 송진호 대표는 바로 그 집돌금농악보존회 예술감독직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지난해 11월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은 그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의 전신 '남사당패'에서 활동한 고 송철수 명인의 손자이기도 하다.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국악과를 졸업한 그는 김덕수 선생과 함께 사물놀이를 창시한 최종실 전 중앙대학교 교수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는다.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걸맞게 국악과 힙합의 공존, 결합을 연구하며 국악의 대중화를 꿈꾸는 그에게 할아버지의 유산 계승은 명분인 동시에 당위였다고 당사자는 얘기한다. 7살 때부터 접해 올해로 국악 인생 23년차에 접어든 그를 의령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의 전신단체인 '남사당패'에서 활동한 의령출신 고 송철수 명인의 손자다. 국악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대표님의 인생으로 들어왔을 것 같은데.

제가 태어나기 8년 전에 돌아가셔서 조부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다. 아버지께서 어릴 때 부끄러움이 많았던 저와 누나 2명을 할아버지 제자께 보냈다. 물론 취미로만 배워보라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집안의 누군가가 할어버지의 길을 걸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대를 이어야한다는 명분이 아니라 순수 취미로만 한 건데 제가 거기에 빠져 학교 전공으로 삼을 각오까지 하게 된 거다. 예술 때문에 가정에 소홀하셨던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아버지의 엄청난 반대가 있었지만 끝내 하게 됐다. 저는 단순히 흥미로 시작한 것과 조금은 다른 경우다. 지난 시절 가장의 부재로 할머니, 아버지, 고모들께서 겪은 아픔을 알기에 그 무게감이나 중압감이 다르다. 마냥 즐겁진 않단 얘기다. 그나마 할아버지 관련 책자가 세상에 나오면서 지금은 “예술이라면 징글징글하다”던 고모님들도 응원해주신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당대 최고 명인이셨다고 들었다. 경남에서 활동하다 수도권으로 진출한다는 게, 정말 실력이 안 되면 불가능한 일인데 할아버지께선 이루신 거다. 영남 남사당패 관계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말 그대로 ‘영남의 전설’이었다 한다. 그래서 너의 책임이 무겁다고, 할아버지의 100 중에 10, 아니 1만 닮아도 된다고 그 관계자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다.

▲국악의 어떤 점이 좋았나.

따뜻한 조명 아래 서 있을 때다. 거기서만큼은 내가 '갑'이다. 제도권 권력층들로부터 제가 언제 박수를 받아보겠나.(웃음) 하지만 무대 위에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호응을 안 해줄 수 없으니 그 한 순간이 너무 좋다. 물론 나머지는 힘들다. 어느 경지까지 올라가기 위한 과정이 너무 힘들고, 공연이 끝난 뒤엔 허무감도 뒤따른다. 그래도 또 하게 되고 하고 싶게 된다. 일 자체가 중독성이 있다.

▲나이가 어려 힘든 점은 없나.

물론 있다. 제 출신 배경과 관련해 오해하시는 분들을 접할 때면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많고. 특히 국악을 안 하시는 분들이 ‘예술가는 힘들다’ ‘못 먹고 산다’고 말할 때가 가장 힘들다. 돈이 전부는 아닌데, 최소한인데, 그런 경제적인 평가 기준 하나로 전체를 판단하니 답답했다. 그나마 할아버지와 인연 있는 분들께서 “그게 네 팔자이니 어쩔 수가 없는 거다”라고 말씀해주실 때면 아, 어쩔 수가 없구나, 비바람을 맞아도 가야 되는구나, 생각하며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김덕수(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사물놀이. 오른쪽 제일 끝이 송 대표가 롤모델로 꼽은 최종실 전 중앙대학교 교수다.

▲존경하는 국악인이 있다면?

김덕수 선생님과 함께 사물놀이를 창시하신 전 중앙대학교 최종실 교수님을 존경한다. 저희 아버지와 교수님이 친구이시고, 할아버지와 최 교수님 아버지는 의형제셨다. 사실 교수님은 제가 중앙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많이 놀라셨다. 그리고 저에게 “대가 끊겼다 생각했는데, 너는 무조건 할아버지 것을 해야 한다. 다른 걸 하면 안 된다. 너에겐 이게 운명 같은 거다”고 말씀해주셨다. 소고 쪽으로 국내 최고이신 교수님은 그렇게 저에게 장구 쪽 길을 열어주셨다. 지난해까지 서울예술단 예술감독을 역임하신 최 교수님은 현재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현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초대 교장이셨던 고 기산 박헌봉 선생의 유지를 받들고자 선생의 고향인 산청에 머물며 경상도 농악의 새로운 부흥을 노리고 계신다. 말년은 국악인을 양성하면서 산청 인근을 국악 본원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로 기산제전위원회 위원장도 겸임 중이시다.

또 한 분은 농암 정우수 선생님이다.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8호 부산고분도리걸립 상쇠 및 풀이 예능보유자이신 정 선생님은 실력도 최고지만 정말 가정적이라는 면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요리는 물론 가정 일을 거의 도맡아 하신다. 예술과 가정 돌봄을 함께 챙기려는 저에겐 큰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다.

▲중앙대 전통예술학부를 졸업하고 진주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진학해 문화예술을 전공하고 있다. 교육자로서 뜻도 있는 건가.

실기와 교육을 병행하고 싶다. 접해 보지 않은 할아버지의 활동 행보에 관한 구술들을 체계화하기 위한 욕심도 물론 있다. 최종실 교수님의 권유가 있었고 진주교육대학교 송미숙 문화예술 전공 주임교수님의 조언이 있었다. 두 분은 “문무를 갖춰야 하는 시대지, 실기로만은 안 된다” “체계화를 해라. 사당패처럼 재주만 보여주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당연히 할아버지를 정리하는 데서도 필요한 부분이다. 저는 할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가 없고 벗어나기도 싫다. 할아버지는 저에겐 불빛 같은 것이다. 따라가고 있는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런 불빛. 30대 중후반까지 정리를 어느 정도 하고 나면, 물론 지금도 제자는 기르고 있지만, 무슨 학파처럼 할아버지의 것으로 가칭 '영남학파'를 만들어보고 싶다. 그래서 만든 것이 천율이라는 문화예술협동조합이다. 천율은 법인 사회적기업이기도 하다. 예술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생계이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면서 생계도 해결해보기 위해 시도한 단체다. 결과는 운에 맡겨야겠지만 노력은 최대한 할 거다. 우연찮게 남들보다 빨리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석·박사 과정을 밟아나가며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어렵고 멀다는 이유로 국악을 등한시 하고 있다. 국악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전통이라는 원형의 가치, 그 본질을 지키되 대중화도 염두에 두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 물론 홍어와 청국장처럼 향이 센 전통을 배제한 국악의 대중화는 지양하고 싶다. 겉핥기식, 보여주기식 국악은 하고 싶지 않다. 본질과 흥미, 재미를 다 가지고 갈 수 있는 것, 그것의 최고봉은 역시 사물놀이라고 생각한다.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 따로 있나.

“노래 가볍게 배워볼래?” 느낌으로 일주일에 6시간씩 고3 학생들에게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학생들이 국악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제안, 제시하는 차원에서 재능기부다. 제 욕심으론 아이들이 무료로 놀 수 있는 놀이 문화, 나아가 자신들의 전공으로까지 삼으면 좋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진 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그들 사이에 하나의 문화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방탄소년단이 한복을 패션으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국악이 어려울 때 사물놀이로 대중을 사로잡은 최종실 교수님처럼, ‘국악은 너무 어렵다’는 인식을 깨나가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지난해 11월 송 대표가 받은 '대한민국 인재상'. 사진=김성대 기자.

▲그러기 위해선 여러 장르를 섞는 이른바 ‘크로스오버’도 염두에 둘 만하다.

개인적으로 힙합에 관심이 많다. 자신의 색깔이 중요하고 박자 위에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에서 힙합은 국악과 비슷하다. 따지고 보면 힙합의 비트와 라임은 국악의 농악과 시조인 셈이다. 다만 우리네 정서에는 남을 공격하는 디스(diss)가 없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영제시조, 석암제시조 등 시조의 프리스타일 운율(라임)에 사물놀이 비트를 녹이는 작업을 생각 중이다. 그래서 힙합을 더 깊이 공부하고 있다. 시조에 비트를 넣어 고등학생은 물론 일반 성인들도 함께 ‘힙합 국악’에 열광하는 플랫폼을 구상하고 있다. 저는 <쇼미더머니>의 ‘고등래퍼’ 같은 후학 양성 시스템이 국악에도 도입되어야 한다는 쪽인데, 어쨌거나 명맥을 잇기 위해선 후계자를 배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등래퍼’는 그런 면에서 좋은 참고 사례라 할 수 있다.

▲대표님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과거 가리온이 시도한 맥락과 얼추 비슷해 보인다.

가리온과 주석이 한 것은 대안이 아닌 맛보기라고 생각한다.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가리온은 사실 직접 만나 제안을 해보고 싶은 팀이기도 하다. 그냥 가깝게만 지내도 영광일 것 같다.(웃음) 예전엔 할아버지 것만 해야지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생각이 갇혀있는 문화라는 걸 깨닫게 됐다.

▲의령출신 예술인과 젊은 국악인들의 모임인 '연희공간 천율(天律, 하늘의 뜻을 음악으로 연주한다)'에 관한 소개를 부탁한다.

천율은 2011년 창단된 팀이다. 군대 갔던 중앙대 동기들 5명이 '하늘의 음악을 해보자' 해서 만들었다. 할아버지 때도 그랬고, 불교와 농악은 떼려야 땔 수 없는 것이어서 그랬는지 군악대 복무 때 뵀던 한 스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그대로 단체 이름이 됐다. '天律'이라는 한자를 부채에 써주신 분은 그 스님이 계신 절의 신도셨는데 우연찮게 그 분도 의령 분이셨다.(웃음) 부채는 연습실에 걸어두었다.

한마디로 천율은 국악에 관심있는 학생들을 기르는 성균관 같은 기능을 하고 싶은 곳이다. 예컨대 원형의 가치 보존을 추구하는 의령 집돌금농악이 한식집이라면 정해진 틀을 벗어던진 채 놀고 공연하며 접근성도 좋은 천율의 종합예술단 성격은 퓨전음식점 같은 것이라 보면 되겠다. 국악을 전공하려는 사람이든 이미 국악을 전공한 사람이든, 천율은 국악을 사랑하는 젊은이라면 누구든 환영한다.

▲현재 의령 집돌금농악보존회 예술감독이다. 중앙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와 의령집돌금농악의 복원에 뛰어들어 전체 12마당 복원에 앞장서고 있는데, 복원이 완료되면 집돌금농악의 무형문화재 지정에 모든 것을 바칠 생각이라고 들었다. 현재 상황은 어떤가.

할아버지께서 남긴 자료와 제자들의 구술을 계속 찾아나가고 있다. 그렇게 외형적인 건 어느 정도 갖췄고, 마지막 목표는 집돌금농악을 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든 걸 바쳐 명맥을 잇겠다는 건 전승자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일단은 학생들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수준으로 집돌금음악을 꾸준히 노출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사실 제도권 국악 단체에 들어가면 더 편하게 제 뜻을 펼칠 수는 있다. 하지만 다 만들어진 곳에 들어가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4~5년간 마지막으로 불태운 흔적,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그 흔적을 일으켜세우고 싶다.

의령군에 위치한 사단법인 연희공간 천율 연습실 입구. 사진=김성대 기자.

▲이제 겨우 30살. 젊음은 부담이기도 하겠지만 무기이기도 할 것이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

7살 때 할아버지 제자에게 배워 올해로 23년차 국악 인생이다. 50~60년 이상 하신 분들에 비하면 저는 아직 반도 못 온 셈이다. 인생의 90%를 국악에 바친 그런 분들도 아직 국악을 모르겠다 하시니 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단, 집돌금농악만큼은 반드시 전승될 수 있도록, 의령을 대표하는 문화재가 되게끔 노력할 것이고, 천율은 국악의 대중화에 기여할 수 있는 팀으로 계속 가꿔나갈 것이다. 무엇보다 가정을 잘 꾸리면서 예술 하며 사는 것. 역시 놓쳐선 안 될 일이다.

김성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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