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모던포크 음악의 현재, 권나무
한국 모던포크 음악의 현재, 권나무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5.17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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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출신...진주교육대학교 졸업
음악과 초등학교교사 생활 병행
지난 1월1일 3집 '새로운 날' 발매
EBS스페이스공감 '헬로루키'로 데뷔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포크노래' 수상

김해 출신의 권나무는 진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해 교사가 됐고, EBS <스페이스공감: 헬로루키>를 통해 뮤지션이 됐다. 현재 천안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사실 작금 한국 모던포크 음악을 대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70년대에 김민기가, 80년대에 시인과 촌장이, 90년대에 김광석이, 2000년대에 루시드 폴이 있었다면 2010년대엔 권나무가 있다. "더 노력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하는 그는 2019년 벽두에 자신의 세 번째 앨범 [새로운 날]을 내놓기도 했다. 이 인터뷰는 그 즈음 기자와 그가 주고 받은 말들이다. 제법 긴 뜸을 들이고서야 이제 여러분과 공유한다. 

진주교육대학교 출신 뮤지션 겸 교사인 권나무.

3집은 “권나무로서 가장 만들고 싶었던 앨범”

▲새 앨범 얘기 좀 하죠. 1월1일에 세 번째 앨범이 나왔어요. 뮤지션에게 세 번째 앨범은 작지 않은 의미를 띨 텐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앨범을 대하셨고 또 준비 과정은 어땠는지 간단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1월1일에 발매한 이유도 궁금하네요.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벌써 옛날 같네요. 1집은 그 때 만들 수밖에 없었던 앨범이었던 것 같아요. 표현이 어떨 진 모르겠지만 들려오는 대로 곡들을 만들었던 시기라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 했어요. 2집은 1집에 흐르던 큰 정서들에 대해 제 스스로가 반감이 들었던 시기랄까요. 조금 더 거리를 가까이, 감정 그대로를 더 있는 그대로 담고 싶었어요. 3집은 제 스스로도 많이 기다렸던 앨범이에요. ‘삼세판’이라고 하잖아요. 어쩌면 권나무로서 앨범은 3집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1집과 2집의 연장선에 있지만 조금은 새로운, 권나무로서 가장 만들고 싶었던 앨범을 남기고자 했어요. 오래 전부터 머릿속으로만 구상해오던 새로운 시도들이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가장 원하는 상태로 원하는 위치들에 자리하길 원했어요. 특히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작업하고 싶었고 생각보다 녹음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편곡하는 과정도 즐겁고 행복했어요.

▲3집을 소개하기 위해 칼 융(정신의학자)과 마이클 슈나이더(국제 에너지정책 전문가)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제3의 존재’와 ‘통일성’, 그리고 이번 앨범의 전제인 숫자 ‘3’에 관한 나무씨의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3집을 준비한지가 꽤 오래되었어요. 표현하고 싶은 정서와 분위기, 메시지 같은 것이 분명히 있었는데 잘 정리되지 않아 막연한 상태로 오래 붙들고 있었어요. 당시 이리저리 고민하던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말씀드려보자면 세 번째 앨범이라는 것, 제 스스로에게 어떤 한 시기를 근사하게 마무리하는 완결의 의미를 갖는 작품이고 싶다는 것, 1집과 2집이 제게 일종의 ‘정’ ‘반’ 이었다면 3집은 ‘합’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것, 단순히 새로운 방법들로 규모를 키우기 보다는 이전 1, 2집을 껴안으면서도 새롭고 싶다는 열망, 제가 생각하는 포크 음악이 가지는 단단한 뼈대는 유지한 채 어울리는 옷들을 천천히 잘 선택해서 입혀보고 싶다는 욕심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 특히 ‘3’이라는 숫자가 제게는 꽤 무겁게 다가왔어요. 막연하게 떠오르던 여러 생각들이 결국 ‘세 번째‘라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 같았기 때문에요. 갈수록 ‘3’이라는 숫자 자체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고 혹시나 제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이리저리 찾아보기도 했어요. 그러다 그림을 그리는 사촌형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연스럽게 도형과 기하, 형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마침 형이 가지고 있던 마이클 슈나이더의 <자연, 예술, 과학의 수학적 원형>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그 책 안에서 저는 많은 갈증들을 해소할 수 있었어요. 그 책에서 칼 융이 한 말들이나 다른 여러 지혜들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인터뷰를 읽어주시는 분들을 위해 글을 옮겨볼게요. 칼 융은 “반대되는 것들끼리의 모든 긴장은 방출로 절정에 이르며, 그것으로부터 제3의 존재가 나온다. 제3의 존재에서 긴장은 해결되고, 잃어버린 통일성이 회복된다” 했고, 마이클 슈나이더는 “3은 안정되어 있으면서도 아름답다. 하나나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비로소 셋이 되면 스스로 유지되는 새로운 전체가 된다. 셋보다 작은 것은 불완전해 보이고, 셋보다 많은 것은 지나쳐 보인다. 하나나 둘에서 셋으로의 도약은 문턱을 넘어 양극화된 한계를 통과하며 재탄생과 변화의 과정을 지난다”고 말했네요. 처음 글을 읽게 되었을 때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먼저 다 해놔서 나는 뭐 먹고 사나?’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되어있던 지혜인가? 이런 생각까지 들면서 혼자 심장이 두근대기도 했어요.

▲첫 곡 ‘빛이 내리네’에선 김창완(산울림)과 김창기(동물원)가 느껴집니다. 두 사람은 실제 나무씨 음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음악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들이 종종 있어서 재미있었는데요. 그 때마다 칭찬으로 듣고 지나왔던 것 같아요. 너무 쉽게 말해버리면 오래 음악을 해 오신 큰 선배들께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마냥 감사를 표하기엔 오래 가까이 두고 음악을 들었다고는 말씀드리긴 어려워서요. 왜냐하면 저는 정말 깊은 팬심이나 존경심이 어떤 건지 잘 아니까요. 제가 두 분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지금 음악을 하는 사람들 중에 작용이건 반작용이건 산울림과 동물원 음악에 영향을 받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겠죠. 어떻게든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특히 처음 밴드를 했던 대학 시절 산울림 음악은 정말 많이 들었죠.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찻잔’ ‘더, 더, 더’ 등 좋아하는 곡들이 많아요. 특히 얼마 전 SBS 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도 초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짧게 짧게 이야기 나누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늘 써왔던 현악 세션과 더불어 거의 쓰지 않던 밴드 세션이 눈에 띕니다. ‘자전거를 타면 너무 좋아’가 대표적이겠네요. 아무래도 표현의 확장 차원에서 선택한 방법으로 보입니다만. 기타 한 대와 노래로만 풀 때와 밴드와 함께 음악을 풀어나갈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 앨범에는 ‘자전거를 타면 너무 좋아’에 풀 드럼이 사용 되었는데요. 곡 분위기상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전자기타 사운드가 자전거 바퀴의 휠을 느끼게 해준다면 드럼의 리듬은 자전거를 타는 기분을 표현하는데 좋은 도구라고 생각했어요. 작업 과정에서는 아무래도 편성 상 베이스 연주가 없다보니 저음역대가 좀 비어서 드럼 녹음과 믹스 시 전체적인 연주 밸런스에서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적절한 상태를 만들어 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어려운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리듬악기도 아주 적절히 사용하면 정말 음악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장치일 텐데요, 저는 그동안의 권나무 음악들은 리듬 악기를 최대한 배재하고 노래 자체의 호흡이나 멜로디 자체로 곡을 이끌어 가고 싶었던 생각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제가 만드는 곡의 형식이 그리 복잡하지는 않다보니 리듬 악기를 사용하면 조금 뻔해 진달까요. 오히려 식상해져버린다거나 표현하고자 하는 분위기를 무게감 있게 전달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막연하게나마 했던 것 같아요. 제가 풀편성으로 밴드를 해온 게 아니라서 리듬을 만드는 것에 그리 큰 흥미도 없고 실력이 부족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아무튼 저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적절하게 사용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이번 앨범이 되었네요.

▲‘모든 것을 하고 말았네’는 어떤 사연을 가진 곡인지 궁금합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내가 하고 있는 게 정말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해서 하는 게 맞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될 때요. 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기 어려웠던 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때 제가 내린 결론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차라리 난 모든 것을 사랑했다고 말해야겠다.’ 권태와 무감의 터널 속에 있었던 시기를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깃발'은 '이천십사년사월'을 잇는 사회참여적 곡입니다. 얼핏 안치환 냄새('Love In Campus'의 후렴 '훨훨~'에서도 그렇고)도 나구요. 이 곡은 어떻게 쓰시게 된 겁니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아요. 자칫 조심스러운 것은 늘 마찬가지에요. 무례가 될 수도 있고요. 저는 제 삶의 영역에서만 싸워내는 것일 뿐 정말로 아무도 없는 높은 곳에서 외치는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노래로 말하고 싶었던 건 삶이라는 게 큰 맥락에서 보편적이라면 그 높이나 무게들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주어져있다는 것이에요. 사람들이랑 같이 일을 하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건, 더 필요한 일이나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오히려 홀로 사람들을 떠나게 되거나 자발적으로 더 많은 짐들을 짊어지게 되는 때가 많다는 것이었어요. 세상이 단순히 선과 악, 옳고 그름으로만 나뉘거나 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도 조금씩 알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자신의 판단에 대해 책임을 지며 나아가야 한다고도 생각하구요. 처음 곡을 만들었을 때 붙여둔 제목은 사실 ‘용산’이었습니다.

▲이번 앨범을 만들며 특히 많이 들었던 뮤지션, 음반이 있었나요? 그것들이 3집에 끼친 영향은?

앨범을 준비하면서 특히 많이 들었다기보다는 오래 좋아해왔기 때문에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곡들은 있었어요. 결과적으로 제 앨범 자체와는 크게 상관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색깔이랄까 방향성 같은 것들은 앨범을 만들기 이전부터 영향을 받아 왔던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음악들이 있겠지만 뮤추얼 베너핏(Mutual Benefit)의 ‘골든 웨이크(Golden Wake)’나 버드 토커(Bird Talker)의 ‘블루 힐러(Blue Healer)’ 같은 곡들도 떠오르네요. 들어보시면 전혀 안 비슷한데? 하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잘 설명하기 어렵군요. 어떤 아름다움을 담고 싶었어요. 제가 최근 참 좋아하는 음악들이에요.

권나무와 음악 친구들. 일명 '권쿼텟'.

▲프로듀싱을 이성혁(기타) 님과 함께 했습니다. 작업은 어땠나요? 둘의 관계는?

형은 어느새 올해로 4년 째 함께 연주하고 있네요. 고맙죠. 물론 고맙다는 것도 좀 미안한 말일 수 있는 게 형이 마냥 수동적으로 제 요구를 맞춰주고 있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좋은 동료이자 친구로서 함께 지낼 수 있어서 고마움을 갖고 있어요. 음악적으로는 여유 공감이 많은 편인 제 음악 사이사이를 부족하거나 과하지 않게 채워주고 있어요. 제가 원하는 것과 연주자로서 형이 원하는 것에 차이도 있을 텐데 이제는 서로 많은 말 하지 않아도 잘 조정되어 가면서 서로 잘 맞는 것 같아서 좋아요. 재미있는 건 음악에서나 삶에서나 비슷한 것 같아요.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무언가를 오래 함께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형도 제게 욕 한바가지 하고 크게 한 대 패주고 싶었을 때도 있었을 텐데 저는 서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비울 건 비우면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형 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에게도 조금씩 더 노력하고 있구요. 더 노력하려고 노력한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겠네요.

3집을 제작하면서 저는 제가 표현하고 싶은 색깔이 확실히 있었고 형도 그동안 저와 오래 함께 해오면서 제가 표현하고 싶은 정서가 어떤 건지, 어느 정도 연주로 표현되길 원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아주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었어요. 제가 데모 음원을 만들고 같이 연주를 해보다가 편곡 과정에서 조금씩 더 구체적으로 각자 연주를 확정할 때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원하는 것들이 잘 조정되더라구요. 이번 앨범에서는 형도 제 음악 안에서 형의 자리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걸 잘 알고 작업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아주 쾌적한 작업이었어요. 형이 브런치에 쓴 글 ‘타인의 음악 속에서 자신을 확립하는 일’에서도 형의 동료로서 모습을 솔직하게 잘 알 수 있었어요.

▲특히 ‘도시에서’라는 곡에서 도드라지는 신재민(Philo’s Planet)님의 녹음, 믹싱, 마스터링 실력에 대한 나무씨의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하하, 네. ‘도시에서’를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은 3집에서 후반 작업이 가장 힘들었던 곡이었거든요. 녹음은 깔끔하게 잘 해냈어요. 처음 전자기타와 이펙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다보니 장비들 준비가 조금 미흡했는데 재민 씨가 때마침 좋은 이펙터를 빌려주셔서 딱 찾던 사운드로 녹음을 마칠 수 있었어요. 믹스와 마스터링 과정에서 처음에는 제가 생각했던 만큼 곡 후반부의 사운드가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어요. 제 음악에 사용되는 악기들에 베이스 음역대가 없다보니 하나씩 단계적으로 사운드를 쌓아가면서 고조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마스터링 최종 음원까지 나온 상황에서도 아쉬움이 있어서 재민 씨와 상의 끝에 쫓기는 일정 속에서 최초 녹음된 소스를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믹싱을 했어요. 아마 이 때가 재민씨도 가장 어렵고 피로한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저도 다시 한 번 해보자 부탁드리기도 죄송하기도 한데 또 만족스럽지는 않으니 참 어렵더라구요. 다행히 다시 작업한 음원이 기대했던 질감이나 사운드로 잘 나와서 그제야 큰 한숨을 쉬었어요. 지금 와 생각하면 그 때 어려웠지만 참 결정을 잘한 것 같아요. 그렇게 작업했는데도 안 나왔다고 생각하면 정말 앨범을 그 때 발매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감히 생각하는 재민 씨 작업의 장점은 연주나 노래들의 자연스러운 질감들을 소중하게 다룬다는 것과, 과한 멋 부리지 않으면서도 촌스럽지 않은 그 지점을 잘 살려 주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제가 3집 작업을 재민 씨와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구요. 그렇다고 상업적인 음악들의 사운드를 못 만들어내시는 분도 아니니까요. 엔지니어로서 판단과 제 요구들 사이에서 미묘하게 아름다운 그 지점들을 찾아가시는 방식들을 저는 깊이 신뢰했어요. 최종 음원들을 제게 보내주시면서 단순히 엔지니어로서가 아니라 함께 음악을 만드는 동료로서 작업한 최종 결과물들을 보낸다는 말씀들을 해주셨을 때 저도 비로소 ‘이제 됐다!’ 싶었어요. 재민씨도 저도 만족할 지점을 서로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재민 씨에게는 권나무가 요구 많고 피곤한 클리이언트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가장 뜻깊은 음반을 함께 만든 정말 좋은 동료였어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비올라와 바이올린을 연주한 강희원, 첼리스트 박혜진, 건반을 맡은 김동수 님에 관한 소개도 함께 해주시겠어요?

희원이도 성혁이 형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같이 연주해오고 있어요. 역시나 오래 저와 함께 지낸다는 게 쉬운 일 만은 아닐 텐데 고마운 마음이 많아요. 희원이는 굉장히 솔직하고 자신의 호불호가 명확한 친구라서 팀의 성비 불균형 속에서도 굳센 자존을 지켜가며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비올라라는 악기에 제가 매력을 느끼고 있었을 때쯤 마침 당시 첼로로 연주를 함께하던 친구가 유학으로 활동이 어렵게 되어서 소개해 준 친구가 희원이여서 그 이후부터 함께 하고 있어요. 희원이에게 가장 고마운 점은 의리가 있다는 점이에요. 아무래도 인디음악을 계속 한다는 게 노력하고 시간 투자하는 것만큼 충분히 되돌아오지 못하는데도 공연이 크던 작던, 페이가 많던 적던, 환경이 좋던 다소 열악하던 ‘같이 하기로 했으면 같이 해야죠’ 한마디 툭 던지고는 늘 함께해왔어요. 2집 발매 이후부터는 저랑 비올라 둘이서 연주하더라도 거의 모든 공연을 함께 해왔던 것 같아요. 새삼 너무 고맙네요. 맛있는 거 더 많이 사주고 잘해야겠어요. 첼리스트 혜진씨는 3집 녹음을 위해 희원이에게 첼리스트를 추천받아서 작업을 함께 하게 되었어요. 아직 정식 공연은 함께 하지 못했네요. 앨범 발매 공연을 비롯해 조금 무게감 있게 준비하고 싶은 공연에 꼭 함께 하기로 이야기 나눴어요. 희원이가 음대를 졸업한 덕분에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아요.

동수는 공중캠프라는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고 스태프 분들과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처음 만났어요. 당시 3집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막연한 생각들이 제 머릿속을 떠다니며 내내 복잡하게 할 때였는데요, 3집에서는 신디사이저로 청량감과 무드를 더하고 싶었고 피아노를 통해 다소 단조로울 수 있는 형식에 무드 있는 옷을 입혀보고 싶었어요. 잘 설명은 못하겠는데 피아노 중심의 작곡이나 편곡은 제게 익숙한 방법이 아니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정서랑은 약간 거리가 있어서 건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기존 권나무가 해오던 음악의 공간 속에 딱 들어맞는 퍼즐 조각들로 건반을 활용하고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전문 연주자보다는 건반을 다루며 자기 음악을 창작하는 송라이터 동료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을 했었어요.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 동수가 개인 작업으로 해오던 곡들을 듣게 되었고 저는 그 자리에서 ‘이 친구다!’ 확신하고 함께 하자고 했어요. 동수는 저와 함께 활동하기 이전부터 밴드 공중그늘의 멤버로 신스를 연주하고 있어요.

▲커버아트가 독특합니다. 추상화 같은데. UTI. JIANG이 그렸다고 돼있네요. 설명 좀 해주세요.

대만 출신의 작가님께 3집 커버아트를 의뢰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독일에 있어서 메일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작업했어요. 만족스러운 디자인이 나와 참 좋았어요. 재미있었던 건 작가님을 만나게 되기 전까지 과정들은 정말 어려웠는데 작가님에게 작업을 의뢰하면서 일사천리로 끝나게 됐다는 거예요. 처음 앨범 디자인을 시작할 땐 앞서 말씀드린 세 번째 앨범으로서 의미들이 자연스럽게 앨범 디자인에 대한 고민으로도 이어지게 되면서 앨범 성격이나 주제와 연결되는 여러 가지 시각적인 형태들에 대해 한창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뭐랄까, 텍스트만 있고 구상하는 이미지는 전혀 없는 상태로 선뜻 디자이너 분들께 의뢰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일단 혼자서 이것저것 해봤어요. 스케치도 해보고 캔버스랑 물감을 사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해보기도 하고, 웹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들도 찾아보고요. 갈증은 점점 커지는데 생각보다 구체화가 잘 되지 않아서 결국에는 부산의 디자인팀 ‘하마맨션’분들께 연락을 드렸어요. 하마맨션과는 앨범을 발매한 이후 1~3집에 수록된 가사들로 작은 가사집 에세이를 제작해보려던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락을 드리게 됐어요. 부산에서 천안까지 올라와주셔서 저의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들을 길게 들어주셨고 이미지로 구체화 해내기 위해 여러 가지 작업들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셨어요. 한참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원하는 건 구체적인 형태였다기보단 앨범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절묘한 색채들을 찾는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앨범 디자인 작업도 그 방향으로 급물살을 탔죠. 형태 고민을 과감히 내려놓고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앨범의 색깔을 그대로 색채로 표현해내는 데 집중을 하게 됐어요.

권나무 3집 '새로운 날' 커버 아트워크. 대만 출신 작가 UTI. JIANG과 3차례 소통 끝에 얻은 결과물이다.

1집 <그림>은 너무 탁하고 진하지 않은 초록, 2집 <사랑은 높은 곳에서 흐르지>는 다소 짙은 파랑색이 주제 컬러라고 생각했어요. 3집은 이 모두를 통합하면서도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산뜻하고 새로운 색채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예로부터 동양에서 색을 다룰 때 노란색이 ‘통합’과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초록, 파랑, 노랑을 주제로 앨범을 표현해보기로 했어요. 문제는 노랑, 초록, 파랑은 그대로 섞으면 촌스럽긴 쉬워도 아름답게 보이기가 힘든 색들이라는 점이었어요. 제 머릿속에는 적당한 채도와 명도, 투명도, 작품 자체의 질감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이게 잘 구현될지도 정확히 모르겠고 설명이 어려워서 일단 색을 잘 다루는 작가님들의 작품들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그 과정에서 UTI. JIANG 작가님을 추천받게 되었고, 바로 인스타그램에서 작업물들을 보았는데 딱 제가 원하는 그 지점들의 색을 너무 잘 다루시더라구요. 독특하게 캔버스에 스티치를 함께 활용하시는 것도 매력적이었구요. 바로 느낌이 왔고 의뢰를 해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어요. 첫 번째 시안이 도착했을 때 이미 앨범 커버로 사용해도 될 만큼 훌륭한 작품이 도착해서 놀랐었는데요, 제가 생각하는 제 앨범의 색깔과 약간 거리가 있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피드백을 했고 받은 두 번째 시안에서 원하는 색과 질감을 거의 다 찾을 수 있게 되었어요. 마침내 세 번째 받은 시안을 그대로 앨범 커버로 확정했어요. 참 오래 고민하고 멀리 돌아 돌아오면서 막막할 때도 많았는데 마지막에 와서는 작업들이 아주 쾌적하고 수월했어요. 고민하고 애쓴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참 좋았어요.

 

음악인·교사 생활 병행...“나만의 방식과 리듬으로”

▲김해 출신이신 걸로 압니다. 초등학교 교사 권나무의 초등학생 시절은 어땠나요?

장난치고 친구들이랑 놀기 바빴죠 뭐.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꼬리 잡고 재미있는 말장난 하는 걸 좋아했어요. 지금 선생이 되고 보니 진짜 담임 선생님들 나 때문에 정말 힘드셨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구요. 아이들 중에 꼭 제 어릴 때처럼 지내는 아이들 보면 기분이 묘하기도 하구요. 공부하러 학원을 다닌다거나 하지 않아서 얼른 학교 마치고 뭐하고 놀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던 것 같아요. 운동장에서 땅을 파고 많이 놀았고, 자전거를 너무 좋아해서 엉덩이 들고 신나게 타면서 친구랑 산으로 들로 온 동네를 쏘다녔던 게 가장 즐거웠어요.

▲교육자는 어릴 때부터 꿈이었나요? 아니면 어떤 롤모델, 목표를 갖게 된 계기 같은 게 있었는지?

어머님이 교사이셨던 게 아마 가장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어요. 어머니와 같은 학교를 다닌 적도 있었는데, 저학년 때라 일찍 수업을 마치고 어머니 교실로 올라가면 가끔 한 삼십분 정도는 어머니 책상에 앉아 수업하시는 걸 보기도 하고 형 누나들이랑 놀기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 와 생각해보면 어머님도 참 곤란하고 어려우셨을 것 같은데 제가 철이 없었죠. 머릿속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 방과 후 어머니는 교무실로 회의 가시고 저는 어머니 책상에 앉아 이것저것 만져보기도 하고 그림도 그렸던 거예요. 교실은 햇볕이 잘 들잖아요. 해질 무렵 지는 햇빛이 교실 창으로 들어오면 저는 그 시간이 참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어요. 학교와 교실이라는 공간이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중학교 무렵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한번은 수업 시간에 각자에게 어울리는 직업을 찾아주는 설문 같은 걸 했는데 저는 한 번도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을 땐데 친구들 대부분이 제가 선생님이 되면 참 잘할 것 같다고 써준 적이 있었어요. 그 당시엔 친구들이 내게 왜 선생님이 어울린다고 했을까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날 이후 제 스스로에 대해 조금씩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 것 같아요. 갈수록 공부가 참 어려워 재수를 했고, 충분한 점수를 얻어 교대엘 가게 됐죠. 공교롭게도 어머니 모교(진주교육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네요.

▲‘어릴 때’가 대표하듯 아이들과 음악은 권나무씨를 통해 만나 매우 따뜻한 시너지를 발휘합니다. 신작을 들어봐도 그렇고 둘은 당분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계속 유지될 것 같은데요. 나무씨의 음악은 아이들로부터 나오는 건가요 아니면,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말씀하신 ‘어릴 때’ 같은 경우는 정말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곡이에요. 제 성격 탓이겠지만 아이들을 위해 노래를 만든다던지 아이들을 통해 노래를 만든다던지 하는 목적의식이나 목표랄까요, 그런 것은 아직 제 창작 방식에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좀 몸이 오그라든다고 해야 할까요. 아직까지는 그냥 제 안에서 꿈틀대는 무언가를 잘 표현하고 싶을 뿐이에요. 물론 창작자로서 내 안에서 걸어 나와 세상을 향한 메시지나 이야기들을 하고 싶을 때도 많지만 그 역시도 제가 원하는 지점과 모양으로 신중히 잘 전달하고 싶기 때문에 아주 가까스로 하나 둘 정도 해낼 뿐인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제가 창작물을 대하는 태도나 창작활동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 보람 같은 것들은 조금 더 제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만들게 된 곡은 이번 새 앨범에 수록된 곡 중에 ‘거짓말은 없어요’라는 곡 딱 하나 밖에 없어요. 말씀하신대로 삶의 경험들이 제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 것일 텐데, 그것을 아이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곡을 썼다고 해석 하는 건 제 입장에서는 너무 진지하고 적극적인 해석인 것 같고, 저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걸 좋아하니 여러 경험들이나 생각들도 자연스럽게 음악으로 함께 표현되는 것 같다 말하고 싶어요. 언젠가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는데요. 만약에 실제 작업을 하게 된다면 제 스스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일을 시작하는 거라 마음먹고 시작할 것 같아요.

▲남들은 하나 해나가기도 벅찰 텐데, 혹 교사 생활과 음악가 생활의 병행이 힘들 때는 없는지요?

좋아하는 일을 두 가지나 꾸준히 해나갈 수 있다는 걸 언제나 축복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려울 때도 많지만 사실 잘 이야기하기 어렵기도 해요. 사치 같아서요. 두 일 모두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 안에서 밖으로 표현하는 일이고 제가 가진 것들을 소모하게 되는 일들이다 보니 힘들 때가 있어요. 음악가의 삶이나 선생의 삶이 공통점도 많은 일들이지만 모든 일들이 그렇듯 각자의 프로페셔널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려면 어느 영역에서나 수많은 시간과 공부가 필요할 텐데, 아무래도 한 가지에 미쳐 제대로 쏟아 부을 수 있는 사람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저는 영영 제 스스로를 칭찬하고 격려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래서 저는 생각은 쉽게 하려고 해요. 너무 많은 욕심 부리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고 정성껏 하자구요. 무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면 집중력 있게 해내는 편인 것 같아요. 두 가지 일을 다 하기로 한 이상 각 영역에서 제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제 개인 시간들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하려고 해요. 반면에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과감히 최소화 하면서 나만의 리듬을 만들어 가는 것도 중요한 것 같구요.

음악과 학교일에 대해 기계적으로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해나간다는 건 제게는 맞지 않는 방식이라 저는 학교에 있을 때에는 학교 일만 최선을 다해서 하고, 음악가로서 작업을 할 때나 무대에 설 때는 음악가로서 최선을 다해 하자는 마음으로 지내려고 해요. 제가 평소 준비하고 노력하는 것들이 아이들 앞에서, 관객들 앞에서 보여지는 것일 테니 평소에 제 삶의 리듬을 잃지 않고 잘 생활하는 게 꼭 필요하구요. 학교에서 수업 못 한다, 학급 운영 못한다는 소릴 듣게 되면 음악도 못할 거예요. 반대로 음악 너무 대충한다는 소리 들으면 선생을 못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주말에 음악 활동을 하고 평일엔 학교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각 영역에서 평일에도 기타 연습을 손에 피나도록 하고 주말에도 수업 준비를 목 빠지게 하시는 분들에 비해 저의 성실함이란 보잘 것 없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만 생각하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각자 방식, 각자 삶이 있고 저는 제가 가진 장점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력하고 저의 리듬으로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 노력해요.

앞으로도 정말 중요한 것들이 무엇일까 늘 고민하고 나와 잘 맞는 방식으로 즐겁게 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열심히 찾아가려고 해요. 언제나 저도 제가 하는 일들로 각 영역에서 해석되고 평가되겠지만 저는 두 가지 일 모두 제 스스로가 만족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을 만큼은 해내고 싶었고 아직까지는 동력을 잃지 않고 지내고 있다 생각해요. 만약 어느 날 어느 순간 한 쪽이 무너지는 때가 온다면 애매하게 도망치거나 덩치가 더 큰 한 쪽으로 숨기는 싫은데 지금으로선 그런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권나무는 2016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포크 노래'상을 받았다. 그는 이 상을 "내 속도로 꾸준히 음악을 해나가도 된다는 아주 큰 격려"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갖게 됐나요?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음악을 ‘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또 언제 하게 됐는지?

대학 시절 밴드를 하면서 음악들이 제 삶으로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고, 어쿠스틱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서 마음대로 노래를 만들어 보기도하고 재미삼아 노래를 녹음해보기도 했어요. 날씨가 좋은 날이면 사람 별로 없는 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냥 음악이 좋을 뿐이었던 것 같아요. 크게 세 가지 계기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저의 첫 공식(?) 무대는 만화가였던 사촌 형과 작업실을 함께 쓰던 형이 홍대 클럽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고, 축하 공연으로 저도 초대한 자리였어요. 사촌형에게 반 장난처럼 제가 캠코더로 녹음해 소리만 추출해놓은 음원들을 보내준 적이 있는데 작업실에서 같이 들었다 하더라구요. 그렇게 축하 공연에 초대받게 된 거였죠.

그렇게 노래를 한 클럽에서 그 다음 주부터 바로 공연을 하게 됐어요. 이후 자연스럽게 다른 공연장에서도 어떻게 아셨는지 연락이 와 공연을 이어가게 되었고, 갑자기 매주 공연 일정들이 생기게 되었죠. 그렇게 서울에서 경남에서 공연을 바쁘게 이어가다 EBS <스페이스 공감 헬로루키>에 음원을 보내게 됐어요. 사실 그 전까지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게 좋아 여기 저기 즐겁게 다니고 있었던 거라면 어려운 경쟁률을 뚫고 헬로루키로 뽑혔다는 소식을 전해 받은 그 순간부터는 제게 제 음악이 갑자기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제 삶의 큰 전환점에 와있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 때까지 제 안에 있던 흐리고 뿌연 것들이 순간 싹 걷히는 듯 느껴지면서 아주 큰 문이 활짝 열리는 기분이었달까요. <스페이스 공감>은 제가 제 음악에 대해 보다 책임감을 가지고 진지하게 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첫 번째 계기였어요.

이후 1집 앨범을 발매하게 되었고 정말 쉴 새 없이 공연을 했어요. 아무 일정 없이 쉬어 본 주말이 그 이후 2~3년 동안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나름 이것저것 하며 열심히 지내다가 한국대중음악상 수상으로 또 한 번 큰 전환을 맞았어요. 한국대중음악상 수상은 내 음악도 이 세상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걸 확실하게 느끼게 해준 너무나 감사한 기회였죠. 전 지금도 이 시대에 음악인으로서 가장 권위 있고 의미 있는 상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마치 평소 존경하는 어른이 저에게 너 열심히 잘 하고 있고 네가 하는 거 참 좋으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시며 제 등을 탁! 때려준 느낌이랄까요. 제가 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꾸준히 제 속도로 음악을 해나가도 된다는 아주 큰 격려로 다가왔어요. 지금도 제가 음악을 하면서 정말 많은 힘이 되고 있어서 한국대중음악상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올해부터는 저도 후원 회원이 되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대학교 때 밴드가 나무씨에게 첫 밴드였나요? 그땐 메탈리카(Metallica)와 드림 씨어터(Dream Theater)까지 소화하신 걸로 압니다. 음악취향은 어떻게 바뀌게 된 건지? 스스로 ‘오래된 미래’라 표현한 포크 음악에 분명 큰 매력을 느껴 방향을 트셨을 텐데요. 트래비스(Travis) 같은 팀도 그 방향 전환의 이유 중 하나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도 다 지난 일이니 나름 잘 소화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뻥은 못 치겠네요. 자주 체하곤 했어요. 나름 열심히 연습했고 아주 가끔 찾아오던 컨디션 좋은날엔 꽤 만족스럽게 부르기도 했는데 늘 제게 맞는 옷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모든 게 너무 어렵기만 했어요. 발성 호흡 등등. 목소리라도 흉내 내면 되려나 싶어 따라만 하다 늘 목만 잠기곤 했죠. 무언가 죽을 만큼 열심히 해보지 않고서 말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제겐 참 어려운 일이었어요. 제가 짧게나마 했었던 건 음악으로서 노래였다기보다는 소리로서 노래였던 것 같아요. 그것엔 결과적으로는 제가 큰 즐거움과 만족을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일렉트릭 기타를 다시 잡을 생각은 없으신지? 지금 본인의 음악에 딱히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전기기타를 잘 다룰 줄 몰라서요. 물론 칠 수야 있겠지만 아직 어쿠스틱기타도 칠 때마다 달리 느껴질 때도 많고 충분히 연습할만한 여유를 만드는 것도 빠듯해서 부담이 되기도 하구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음악, 제가 부르고 싶은 노래에 제 연주가 꼭 필요하다면 연주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동료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요. 집에서 가끔 치고 놀 땐 있어요. 3집에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제 음악에도 필요한 악기가 되어가고 있는 건 사실이네요. 언젠가 전기기타를 들고 밴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마음속에 품고 있어요. 드럼과 베이스와 함께 연주하고 싶어요. 가슴 뛰는 연주들을 뚫어내며 노래하고 싶어요.

KBS 1TV '올댓뮤직'에 출연한 권나무.
KBS 1TV '올댓뮤직'에 출연한 권나무. 사진=올댓뮤직 갈무리.

진주는 내가 힘껏 방황했던 곳

▲진주교육대학교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보다 수도권에 가까운 교육대학교에도 합격했었지만 두 곳 모두 면접을 보러 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진주로 가야겠다는 순간적인 확신을 했었어요. 정확히 설명하긴 어려운데, 버스 창밖으로 보이던 진주의 오후가 참 좋았어요. 도시를 감싸며 흐르는 남강과 풍경들이 제 맘을 편안하게 했어요. 만약 두 곳 모두 합격한다면 나는 진주에서 살아야겠다 생각했었어요.

▲진주는 나무씨에게 어떤 곳입니까? 청년 시절을 보낸 곳이어서 조금은 남다른 의미를 가질 것 같습니다만.

뒤늦게 자아가 폭발하고 온갖 감정들과 욕망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들에 내던져진 것처럼 어쩔 수 없이 내 스스로를 직면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고, 비로소 힘껏 방황하기도 했던 곳이었던 것 같아요. 내용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한 번 쯤은 겪는 불안하고 위험했던 시기였던 것도 같고, 정확히 무언지 모를 것들을 향해 미친 듯 에너지를 쏟아 붓던 곳이라고 할까요. 지금 와 생각하면 별 청승을 혼자 다 떨고 별 진상도 다부리고 별 한심한 짓도 자랑인 줄 알고 하던 그런 진짜 사춘기를 대학시절 진주에서 다 겪었던 것 같아요. 우정과 사랑에 대해 그 무엇으로도 배울 수 없는 부끄럽고 고마운 경험들을 많이 했던 곳이기도 하구요. 그래서인지 진주에 갈 때마다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 괜히 울컥하고 그런 게 있어요.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러브스토리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두 분 사이에 ‘음악’이라는 공감대도 있는 건지?

여기에서 말씀드리긴 좀 쑥스럽고, 사실 딱히 드릴 말씀도 없어서요. 음악이라는 공감대는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꼭 필요하지는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함께 사는 사람은 제가 제 음악 밖으로 걸어 나와 있을 때에도 좀 더 건강히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주고 응원해주고 힘이 되어주는 지혜로운 분이라는 이야기 정도만 남기고 싶네요.

▲새 앨범에 담긴 비교적 밝고 긍정적인 기운은 분명 ‘결혼한 권나무’의 현재를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듯 보입니다. 앨범 타이틀이자 타이틀 곡 제목이기도 한 ‘새로운 날’과 '그대 곁에 있으면'의 휘파람이 특히 그런데요. 어떤가요?

저는 크게 달라진 건 없고 영향 받은 바 없다, 고 말한 적도 있었는데요, 사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주변 동료들이나 저를 오래 본 사람들은 확실히 달라진 면들 있다 말해주기도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새 앨범에 담긴 곡들은 최근 혹은 현재의 저를 반영하고 있다기보다는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었고 막연하게나마 머리로 구상해왔었던 것들이니까요. 제 삶에는 틀림없이 새로운 날이 열렸지만 그래서 ‘새로운 날’이 탄생한 건 아니거든요. 조금씩 작은 변화들이 모여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생각하고 싶어요. 왠지 자꾸 아니라고만 말하게 되는 것 같아 민망하네요. 그동안 제 노래들이 제 삶을 한 발 뒤에서 따라왔었다면 이번 3집은 비로소 시간차가 좀 맞아져 있을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이제는 삶이 음악을 따라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이고, 이제 자신의 아이도 보신 만큼 한국의 저출산 문제에 대한 나무씨의 생각을 듣고 싶네요.

피할 수 없는 사회적인 현상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거나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 의미로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게 행복한 일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당연히 출산에 대한 결심도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평소 음악을 많이 들으시는 것 같습니다. 한국 인디음악은 따로 챙겨들으시는 걸로 알고 있고 ‘랏도의 밴드 뮤직(이하 ‘랏밴뮤’)’ 선곡 리스트를 보면 해외(인디)음악도 섭섭지 않게 듣고 계신 것 같더군요. 리스너로서 권나무는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까?

라디오를 진행하게 되면서 저도 음악을 조금씩 다양하게 들어보려 노력은 하는데요, 쉽게 되진 않더라구요. 듣다보니 저도 비슷한 성향의 곡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장르적으로는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고, 저는 복잡한 사운드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단순히 악기 구성이 많고 적음이라기보다는 큰 흐름이 담백하면서도 세련되고 감각적이라 느껴지는 음악들이 좋아요. 아날로그 감성이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촌스럽지 않은 음악들이 좋아요. 청량한 음악들도 좋아하고, 감정과 서사가 폭발하는 음악들도 좋아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길거리에서 자주 듣게 되는 음악들이나 그와 비슷한 음악들은 애써 찾아 듣지 않는 것 같아요. 음악 편식도 심하고 새롭게 취향을 확장해 나가기보단 저의 어떤 한 시기에 좋아하는 분위기나 스타일의 음악들이 있고 그런 음악들을 잔뜩 찾아 들으며 그 시기들을 지나가곤 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정말 못 듣는 음악도 있는데 뭐라고 잘 표현을 못하겠네요. 그냥 느끼한 음악들이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랏밴뮤’는 이제 나무씨 일상의 한 부분이 됐을 것 같습니다. 나무씨 생활에서 랏밴뮤는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방송 제목은 왜 ‘알고 보면 잘 몰라요’인가요?

음악을 하면서 때로는 조금씩 제 일부를 세상에 전시해 놓고 사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더라구요. 조금씩 허용 가능한 내 모습들을 세상에 던져 놓고 정말 사람들은 잘 모르는 나의 다른 모습들은 더 작고 내밀한 나의 삶 속에 자리를 만들어 넣어 두어야하니까요. 라디오도 그래요. 라디오는 이미 꽤 오래 제 삶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어느새 다른 매체나 다른 곳에서 드러나지 않던 제가 많이 던져졌을 거예요. 아무리 의식하고 말한다 해도 여타 라디오들처럼 작가가 있어서 스크립트를 가지고 방송하거나 부분적으로 나의 판단이나 생각을 전하는 식으로 방송을 이끌어가기는 어려운 콘텐츠라, 오래 진행하면 할수록 점점 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콘텐츠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적어지는 느낌이 들 때도 많아요. 동어 반복의 늪에 빠지기도 하구요. 밑천도 금방 드러나고 아는 건 계속 알고 모르는 건 계속 모르는 그 상태가 지속되는 것 같을 때 좀 힘들고 어렵더라구요.

랏밴뮤를 시작할 때 다짐했던 것 같아요. 애초 내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을 아는 정도로만 말하자. 내가 가진 특별한 지식이나 특별한 감각이 없다면 그냥 내가 겪는 일상, 내 생각들, 내가 느낀 감정들을 나누면 그게 결국 나만이 할 수 있는 내 라디오가 되지 않겠나 생각했던 것 같아요. 미리 선언하는 거죠. 그냥 다른 고민 말고 내 자체로 한번 해보겠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런 마음이었어요. 어찌 보면 대단히 게으른 마인드라 생각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저로서는 그 방법 말고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오히려 그게 제 장점이자 제 무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구요. 제가 계속해서 새로운 걸 만들고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갇히는 순간 저는 더 이상 저답게 생각하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것은 더 이상 제가 아니기 때문에 나만이 할 수 있는 라디오를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2집 '사랑은 높은 곳에서 흐르지'를 낸 직후의 권나무.

▲나무씨 음악에서 가사는 때로 멜로디를 관통하거나 능가하는 존재감을 뽐냅니다. 가끔씩 그 가사들은 득도한 사람이 휘갈긴 깨달음 같이 느껴질 때도 있는데요. ‘이건 편협한 사고’나 ‘화분’이 퍼뜩 떠오르네요. 가사를 쓸 때 나무씨는 상상과 현실, 어디에 더 마음을 두는 편인가요? 가사는 한 번에 써내려가는 편인지, 아니면 틈틈이 메모하는 방식으로 완성돼가지는지도 궁금하네요.

틈틈이 메모해서 만들어진 곡은 거의 없었던 것 같고, 뭐랄까요 마음속에 일종의 이물감, 불편함 같은 것들이 서서히 쌓이다 어느 날 한 번에 쏟아져 나오며 정리가 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상상이라기보다는 어떤 ‘정서’에, 현실이라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들에 더 잘 몰입할 수 있고 마음이 쓰입니다. 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써두고 곡을 붙인 노래는 싱글로 편집 앨범에 참여했던 ‘죽음은 무죄’ 정도가 유일하네요. 굳이 생각해보자면 보통 연주를 하다 멜로디와 가사가 함께 툭하고 내뱉어 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나무씨의 그 무덤덤한 창법은 어떻게 나온 겁니까? 하지만 지를 땐 또 지르십니다. 본인은 ‘노래를 잘 부른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나무씨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너를 찾아서’를 들으며 질문 드립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제가 노래를 참 잘한다고 생각해요. 진심이에요. 물론 제 노래를요. 그렇다면 노래를 잘 부른 다는 건 뭘까요. 밴드 보컬이었을 때, 처음 내 노래를 만들었을 때, 음악가로서 내 이름을 걸고 무대에 섰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노래를 잘하는 것이냐에 대한 생각이 다 달랐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아무래도 저는 제 음악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표현하고 싶은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래하는 게’ 노래를 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노래를 참 잘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제 노래는 제가 제일 잘 부르고 모방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두가 자기 노래를 즐겨 부른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무것도 두렵지 않겠죠. 아름답다는 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처럼 따지기 시작하면 복잡한데, 저는 자기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걸 표현할 줄 아는 게 잘하는 거고, 그게 바로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무씨 음악과 가사의 큰 주제는 무엇일까요? 3집 홍보글에도 적혀있듯 관조와 수용(1집), 선언과 방출(2집), 아니면 통과와 재탄생, 변화와 통합(3집)에 그 정답이 있을지?

정리하다보니 그렇게 분류를 하게 되더라구요. 주제가 먼저인지 음악이 먼저인지 순서는 잘모르겠지만 한 발 떨어져서 본다면 그냥 저라는 사람의 변화 과정인 것 같아요. 그 변화가 흔히 말하는 성장이나 성숙으로서 연결성을 갖는 것일 수도 있고, 단지 어떤 한 시기에 대한 표상일 수도 있겠죠. 가까운 어떤 분은 3집에 대한 짧은 소개글들을 읽으시고는 "나무씨, 4집은 없는 거예요?"라고 물으시더라구요. 속으로 뜨끔했습니다. 3집을 발매하며 사실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세상은 끝없이 변화하니까 음악가로서 세상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제게 있어 음악의 즐거움과 가치는 ‘내 안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표현되기를 소망하는 내적 에너지나 정서를 내가 아름답거나 좋다고 느끼는 적절하고 만족할 모습의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에도 많이 담겨 있어요. 때문에 과연 그 에너지나 정서들이 얼마나 더 나다울 수 있고,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도 늘 함께 있거든요. 뭐든지 저는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잘 정리하고 의미 부여도 하는 것이 많으니 앞으로 겪게될 일들이 제 음악의 주제가 될거라 생각해요.

▲공연 때 카피 곡을 절대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팬들은 때론 나무씨가 불러주는 김광석, 밥 딜런, 한대수를 듣고 싶어할 수도 있을 건데요. 이 원칙을 고수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음악가로서 내 노래를 하는 사람이라고 제 스스로를 규정하겠다 다짐한 이후 오히려 더 단순해졌어요. ‘내 노래가 있는데 왜 무대에서 다른 사람 노래를 불러야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저는 그 질문에 대해 별다른 답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냥 나는 내 노래를 가진 사람이고 그러니 내 노래를 열심히 잘하고 싶어요. 공연장에 찾아오는 관객분들도 제 음악을 듣고 제 모습을 보고 싶어 오신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것에 충실히 저를 던져 넣기에도 빠듯한 사람이기도 해요. 단순히 생각해보더라도 제가 제 노래 하기로 했으면 한 번이라도 더 자기 노래를 불러야 우연히라도 더 마음에 가 닿든, 유명해지든, 부자가 되든, 뒤늦게 심금을 울리든 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요. 어쩌다보니 원칙이 되어버렸네요. 일단은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서 앞으로도 그럴 생각입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나무씨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 나무씨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 들은 음반, 본 영화 또는 공연을 짧게짧게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제게도 참 중요한 사람들이 있는데 죄송하지만 이제는 더 말씀드리고 싶지 않아요. 많이 이야기를 하기도 했던 것 같고 사실 이제는 크게 상관 없는 것 같아요. 제게 영향을 준 것들은 더 이상은 제가 만날 수 없거나, 읽어도 들어도 보아도 예전처럼 황홀하지 못하니까요. 슬플 때도 있어요. 특히나 사람에 관해서는 그래서 이제는 잘 이야기를 못하겠고 안 하려구요. 애써 잊을 수도 없고 제가 노력한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을 테니 그냥 곁에 두고 늘 함께 있지만 더 이상 신경쓰고 싶진 않네요.

▲끝으로 교육자로서, 뮤지션으로서 또는 인간 권나무로서 앞으로 살아갈 길에 관해 자유롭게 말씀해주세요.

매일매일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충실하게 노력하며 사랑하며 살고 싶어요. 멀리 미루어두고 기다리는 것 말고 지금 당장 눈 앞에 잡힐 듯한 행복을 얻기 위해 더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살면서 얻게 된 것들에 대한 고마움들을 더욱 잘 표현하고 다시 되돌려 줄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싶어요. 나의 성취와 기쁨이 내 곁에 있는 사람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걸 항상 마음에 새기며 살고 싶어요. 모두 제가 노력해야하는 부분들이네요.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인터뷰 김성대 기자 / 사진 권나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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