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하고 글 쓰는 DJ, 래피
음악 하고 글 쓰는 DJ, 래피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7.24 14: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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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에서 태어나 진주서 학창시절 보내
부친의 음악 반대, 꿈 이루려 경희대 진학
경희대학교 블랙뮤직 동아리 '래빈' 만들어
한달 70권 읽는 독서광, 자기 책도 쓰는 '작가'
SBS라디오와 15년 인연, 주말 라디오 고정 DJ도
후배들 돕고자 '래피 밴드' 만들어 음악 활동

DJ 래피의 고향은 경남 하동이다. 태어난 곳은 거기지만 그가 뿌리를 내리고 산 곳은 경남 진주였다. 학창시절 로커(Rocker) 지망생이었던 그는 형사였던 부친의 반대에 맞서 서울 쪽 대학 진학을 모색했고, 결국 진주고등학교에서 경희대학교 섬유공학과로 자신의 둥지를 옮겼다. 드러머로 록 음악을 이어나가려 했던 그는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경희대 유명 록 동아리 '탈무드' 오디션에서 탈락한 뒤 군 입대 전 아는 형이 운영한 진주 '매드월드'서 DJ 아르바이트 일을 했다. 그는 이때 록과 헤비메탈 외 힙합과 팝 등 다양한 음악들을 접했다고 했다. 래피는 이후 전설의 힙합 동아리 '래빈'을 경희대 역사에 새기고 모교를 떠난다.

래피는 '글 쓰는 DJ'다. 담도암을 앓았던 부친의 병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읽고 쓴 글들이 그를 작가로 만들었고, '철이와 미애'를 이끈 디제이 처리(신철)의 코너 게스트를 시작으로 SBS라디오와 15년 인연을 맺은 끝에 정식 DJ가 됐다. 한 달에 50~70권 책을 반드시 읽는 독서광, 자신의 생각을 책과 강연으로 나누는 작가, 대한민국 최초 랩 배틀대회로 알려진 2000년 '엠넷 프리스타일 랩 배틀대회' 우승자, SBS 주말 라디오 고정 DJ, 180여 자작곡을 가진 뮤지션.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그를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는 DJ 래피는 하동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향이 진주인 건가.

아니다. 태어난 곳은 하동이다. 아버지께서 형사셨는데 복무지에 따라 여기저기 이사를 많이 다녔다. 하동 악양 등 인근을 다니다 6살 때부터 진주에 정착했다.

▲진주고등학교 출신이다. 2학년 때(1992년도) 록밴드 ‘비 갠 오후’의 보컬로 활동했다고. 

로커 지망생이었다. 우리 때는 우리가 최초인 줄 알았던 록밴드.(웃음) 1년 위 선배 두 명이 보컬과 드럼을 맡았고 나머지가 우리 기수였다. 보컬이 2명인 밴드였는데 스틸 하트 스타일 음악을 했다. 문화예술회관에서 한 ‘진고 축제’에서 엔딩 무대를 맡기도 했는데, 내 생애 첫 공식무대였다. 너무 떨려서 키보드 치던 친구와 우황청심환을 반씩 나눠먹었던 기억이 난다.(웃음) 무대에선 신성우의 ‘내일을 향해’, 에릭 클랩튼의 ‘원더풀 투나잇’ 같은 곡을 했다.

▲록음악에 빠진 계기는.

학교 서클 위주로 놀다 뭔가 새로운 게 없나 하던 끝에 만든 것이 바로 록밴드였다. 당시엔 진주 시내에 음악학원이 두 군데 밖에 없었다. 경상대학교 ‘기라성’ 같은 동아리들이 들르던 곳이었는데, 나는 D'NC(더티 앤 클린) 박태석 선배와 어울리며 초전동 비닐하우스에서 연습을 하곤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르를 좋아했나.

데스메탈, 스래쉬메탈을 좋아했다. <핫뮤직>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잡지 마지막 사고파는 ‘장터’에서 한 사람을 알게 돼 편지를 보냈다. ‘음악을 들을 수가 없다. 테이프에다 녹음을 좀 떠주면 안 되겠냐’ 그렇게 힘들게 음악을 들었다. 서울에 머키레코드라고 있었는데 거기 가서 한 번에 많이 듣기도 했다. DNC라는 밴드를 좋아한 이유도 그들이 스래쉬메탈을 했기 때문이다.

▲경희대 섬유공학과엘 진학했다. 좀 의외다.

고2 때 록밴드를 하면서 음악에 미쳤었다. 내 인생은 무조건 음악으로 가야 한다, 무조건 음악에 몸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무조건 안 된다고 하셨다. 내가 원하는 걸 하기 위해선 그런 아버지로부터 떠나야 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가출과 대학 진학. 수능 때까진 1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친누나가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3수생 아는 형을 꼬드겼다. 방학 때 서울로 같이 가자. 그렇게 고2 여름방학에 서울대 중앙도서관엘 간다. 새벽 5시30분에 도서관 자리 잡고 밤 12시에 나오는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일주일은 공부가 안 됐다. 앉아서 음악 듣고 그림만 그렸다. 그러다 일주일 뒤 의욕이 확 생겼다. 대학의 낭만 같은 걸 알게 된 거다. 그 때부터 공부의 패턴이 만들어졌다. 밴드 생활을 하면서 하루 3시간 자며 공부하는. 그런데 수학이 잘 안 됐다. 그래서 수학은 포기하고 언어영역과 영어에 집중했다. 제가 수능 1세대인데 8월과 11월 시험을 두 번 치렀다. 8월 언어영역에서 3개 틀리고 영어에선 1개 틀렸다. 담임 선생님이 부산대 진학을 제안하셨다. 어떻게든 아버지로부터 멀리 가야했던 나는 서울 쪽으로 더 알아봤고 경희대 섬유공학과가 거기에 있었다. 내 성적으로 여긴 무조건 합격이었다. 그렇게 가게 된 거다.

▲록에서 힙합으로 음악 메뉴를 바꾼 이유는.

처음엔 경희대의 유명한 록 서클 ‘탈무드’엘 들어가려 했다. 권인하, 변진섭, 넥스트 이동규 등이 거쳤던 곳이다. 드러머 오디션을 보러갔는데 사투리 때문에 탈락했다. ‘사투리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94년 겨울, 군 입대를 지원했고 ‘알바나 좀 해야지’ 하는 생각에 당시 아는 선배가 운영하던 진주 매드월드라는 곳엘 갔다. 선배는 ‘DJ가 없다, 네가 음악 좀 아니까 해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록 스피릿이 충만했던 때다. 무슨 로커가 디제이를 하냐, 버텼는데 자본주의의 힘에 무너졌다.(웃음) 일단 거기선 원하는 CD를 다 사줬고, 그런 만큼 나는 대중적인 노래를 틀어야 했다. 그렇게 안 듣던 팝을 많이 알게 됐다.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 같은 밴드를 좋아했지만 그 시기 나는 외국 힙합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98년 군 제대 후 경희대 힙합 동아리 래빈을 만들었다. 그 시절 래빈은 ‘중앙 동아리’로서 나름 많은 활동을 했다. 가요제 나가서 상도 많이 받았고. 유명세에 힘입어 동아리 방도 2개를 쓰게 됐는데 그중 하나는 녹음실이었다. 래빈이 아니었다면 나는 록드러머가 될 뻔 했다.

경희대 록 동아리 '탈무드' 오디션(드럼)에서 탈락을 경험한 래피는 군 제대 후 경희대 힙합 동아리 '래빈'을 만들었다.

▲진주는 요즘도 자주 가나.

어머니께서 진주에 혼자 계셔 자주 간다. 행사가 있을 때도 가고, 초등학교 동창들도 한 번씩 본다.

▲‘글 쓰는 DJ’ ‘활자중독자’로 불린다. 2018년에만 책을 3권 출간했고, 올해도 몇 권이 나올 예정이라 들었다. 다작이다.

2012년 즈음 아버지께서 암 선고를 받으셨다. 담도암이었는데 병원에선 6개월 밖에 못 산다고 했다. 아버지 암을 연구하기 위해 활자 중독자가 됐다. 하지만 연구 결과 치유 방법이 없었다. 담도암은 발견 순간 거의가 말기이기 때문이다. 항암 치료도 안 되고. 그런데 찾아보니 자연으로 치유된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아버지께선 서울 모 병원에서 2년을 더 계시다 돌아가셨다. 병을 공부하다 보니 한의학 쪽 음양오행을 알게 됐고 자연스레 주역, 동양철학 쪽으로 많이 보게 됐다. <내 인생의 주역>은 그렇게 나온 책이다. 제가 에버노트 앱을 쓰는데, 책을 읽고 나면 독서노트를 반드시 쓴다. 그 노트가 3천 수 백 권이 쌓였다. 그걸 1차로 원고화 해서 출판자 편집자에게 넘겼고, 긴 시간 있던 그 원고들의 맥락을 재조합 해 책들이 많이 나왔던 거다. 하지만 올해 이후 나올 책들은 그런 식으로 빨리 나오진 않을 거다. 앞으로 나올 책들은 좀 더 심혈을 기울여 쓸 계획이다. 지금 준비 중인 책의 주제는 사주팔자다. 누구라도 자기 사주 정도는 들여다 볼 수 있게끔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가제는 '너 요즘도 점집 가니?'다.(웃음) 전문서적 느낌은 아니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사주에세이' 정도로 보면 맞겠다.

▲24시간 책만 읽을 수도 있다 말할 정도로 독서광인 걸로 안다. 지난 5월엔 무려 78권을 읽었다고.

한 달에 일정 금액을 내면 전자책을 빌려볼 수 있는 서비스를 활용한다. 그렇게 매월 50~70권 정도 읽는다. 일하는 시간 빼곤 계속 책을 읽는 거다. 누굴 기다리는 시간에도 보고, 전철 타고 가면서도 읽고,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해야 할 땐 오디오북을 듣는다. 물론 일이 없는 날엔 종일 책만 본다. 집에 TV가 없기 때문이다. 장르는 가리지 않는다.

▲책 <세상은 됐고 나를 바꾼다>에서 말한 ‘구나 구나 법칙’이 재밌다. 평소에도 긍정적인 편인가.

제 인생은 실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실패로 치면 대한민국 탑3에 들 거다.(웃음) 진짜 많은 시도를 했고 지금도 실패를 하고 있다. 한 번은 제 매니저와 함께 <무한도전> 피디를 만나러 갔었다. <무한도전> 출연 관련 미팅이었다. 그런데 피디 왈, 내가 너무 무섭다더라.(웃음) 그렇게 내가 탈락하고 하하가 들어갔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내 잘못인데, 그때는 그걸 남탓으로 돌렸다. 아, 나는 왜 안 되냐. 책을 읽으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의 원리 자체가 그랬다. 야구도 제아무리 잘 쳐봤자 3할이고, 호랑이와 사자의 사냥 성공률도 10~20% 밖에 안 된다. 실패는 기본값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내가 항상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발상의 전환이 됐다. 그냥 '그렇구나' 하면 싸울 일이 없는데 인정을 못 하니 싸우는 거다. 겪은 실패들, 타인과의 다름을 인정해버리면 편협해지지 않을 수 있다. 전 저를 반우스갯소리로 '젖은 낙엽'이라 부른다. 꿋꿋이 묻어 다니며 살기 때문이다.(웃음)

뮤지션 래피는 한 달 최대 70권 이상 책을 읽는다. 그는 읽은 것들을 자신의 글로 소화시켜 대중과 공유한다. 사진은 래피의 저서 <내 인생의 주역>과 디제잉 장비들.

▲DJ 일(래피는 현재 토, 일요일 오후 2시~4시 SBS 러브 FM(103.5MHz) 생방송 ‘DJ 래피의 드라이브 뮤직’을 맡고 있다-편집자주)은 어떻게 하게 됐나.

2004년부터 SBS엘 나가기 시작했다. 디제이 처리가 제 스승님이다. 한날 형이 '래피야, 코너가 하나 있는데 이건 우리나라에서 너 밖에 못 한다'며 제안을 해오셨다. 트로트를 리믹스 해 거기에 랩을 집어넣는 작업이었다. 나름 '힙합 부심'을 부리고 있을 때여서 하루만 생각해보고 연락을 드리겠다고 했다. '그래, 음악에 무슨 장르냐' 생각 끝에 수락, 주일 한 코너를 맡게 되면서 라디오 일을 시작하게 됐다. 보통 라디오 프로 코너 게스트들은 피디가 바뀌거나 진행자가 그만 두면 하차 하게 돼있는데 제 경우는 철이 형이 그만 두고 김흥국님 프로에 게스트로, '배칠수 전영미의 9595' 코너에도 들어가고, 2007년엔 '김창열의 올드스쿨'에서도 코너를 맡았다. 돌이켜보니 2004년부터 SBS라디오 게스트로 근속해온 셈이다.(웃음) 그러던 2018년 9월, 마침내 내 이름으로 된 프로그램을 맡게 됐다. 진짜 DJ가 된 거다. 주말 생방송인데 사람들이 많이 좋아해준다. 선곡은 믹스 절반, 실시간 신청곡 절반 해서 신나는 것 위주로 튼다. 그리고 제 방송엔 게스트가 없다.

▲지난해 지방선거 때 제공한 모 후보의 선거송 ‘1번이다’는 NC 다이노스 야구단 응원가 ‘치킨이닭’의 변주였다.

어떤 고전 책에 '신경 써서 심은 꽃은 피지도 않고, 무심히 심은 버드나무는 그늘을 드리운다'는 구절이 있다. '치킨이닭'이 딱 그 격이었다. 이 곡은 내가 좋아하는 배우 최광제가 무명 시절 '광제가 간다'라는 유튜브 방송을 할 때 "이거 네 테마곡으로 써라"며 만들어준 거다. 그렇게 갖고만 있다가 개그맨 한민관이 배틀그라운드 게임 방송 때 쓰려 한다며 '형, 노래 하나 만들어줘' 해서 또 주게 된다. 그걸 NC 다이노스 관계자가 들었던 거고 여차저차 해서 지난 지방선거 때 진주에서까지 울려퍼진 거다.

▲당신은 이른바 ‘힙합 1세대’ 래퍼다. 래피를 힙합의 세계로 이끌어준 앨범, 아티스트가 궁금하다.

딱히 그런 건 없다. 따지고 보면 매드월드가 날 힙합의 세계로 이끈 거지.(웃음) 힙합은 우-탱 클랜 등 가리지 않고 다 들었다.

▲2000년도 엠넷에서 주최한 '프리스타일 랩 배틀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지금의 <쇼미더머니>와 비슷한 대회였는데.

이것도 내 실패 중 하나였다. 지금 <쇼미더머니>에서 우승은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다. 엠넷의 그 프로는 대한민국 최초의 힙합 방송이었지만 별로 주어지는 건 없었다. 10분짜리 엠넷 프로그램 진행자 자격이 전부였다. 하필이면 거기서 우승을 한 거지.(웃음) 물론 우승자라는 '타이틀'은 남아 있다. 

▲<쇼미더머니>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린다. 래피의 생각은.

대다수 사람들이 오독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바로 에디슨이 했다는 "천재는 99% 노력과 1% 영감으로 이뤄진다"다. 그 말은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게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1% 영감이 없으면 소용 없다는 뜻이다. 제가 래퍼 지망생들을 가르칠 때도 너 하루에 몇 시간 연습 하느냐, 연습은 다른 애들도 한다, 99% 노력은 누구나 다 한다, 당락은 1% 영감에서 갈리는 거다, 라고 늘 얘기한다. 심지어 힙합은 '예술'이 아닌가. 저는 <쇼미더머니>에 나와서 사람들에게 알려지느냐 마느냐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본다. 작금 대한민국 래퍼들의 1%를 메워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쇼미더머니> 출연이다. 그건 누구도 부정 못한다. 나갈 수 있다면 무조건 나가라 말해주고 싶다.

SBS라디오와 인연을 맺은지 15년 만에 처음 맡은 래피 자신의 고정 방송 'DJ 래피의 드라이브 뮤직'.

▲‘힙합 1세대’라는 전제가 주는 무게감 같은 게 따로 있는지.

없다. 타이틀이긴 해도, 제가 중간에 한국 힙합에 기여한 바는 별로 없다. 트로트와 테크노, 국악까지 접목하는 저는 힙합계에서 약간 이단인데, 이게 저에겐 나비효과를 가져다 줬다. 그 일은 송대관, 설운도, 정수라, 장윤정('어머나' 리믹스 버전)님을 알게 해줬고 이승철 형의 전국 투어 때 합류한 최초 래퍼 자리를 내 것으로 만들어줬다. 그러고보면 제가 실패도 많이 했지만 '최초'도 많이 했다.(웃음)

▲힙합이 케이팝의 대세가 될 거라 예상(예감) 했었나.

못했다. 다만, 힙합 스타일 음악이 월드뮤직 추세로 가는구나는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랩이냐 노래냐' 차이가 느껴지는 음악은 거의가 힙합 스타일을 차용하고 있었다.

▲근래 몇몇 국내 래퍼들이 대중이 쉬 받아들이기 힘든 표현들을 거침없이 하며 논란이 일곤 한다.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인데. 작금의 한국 힙합, 어떻게 보는가.

못 하게 할 순 없지만 나는 그런 걸 싫어한다. 전 말을 바꾸면 사람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당연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록 그 래퍼에게 안 좋다고 본다. 좋지 않은 말을 내뱉은 사람의 운명은 안 좋은 쪽으로 가게 돼 있다. 한자 중에 목숨 명(命)자가 있다. 입 구(口)에 하여금 령(令)이 더해진 글자인데, 입으로 하여금 결단나는 것이 사람 목숨이라는 뜻이다. 음과 양이 삶이라고 했을 때 입으로 들어가는 게 음, 나오는 게 양의 개념이다. 말은 나오는 것이므로 함부로 내뱉으면 당연히 그 사람 운명에 지장을 준다.

▲록은 이래야 한다, 힙합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생각에 대한 생각은.

나 자체가 이단이어서 그런 건 생각 안 한다. 루이 암스트롱이었나. "장르는 아무 상관 없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건 음악 그 자체다"라고 말한 사람이. 제가 이전부터 신봉해온 말이다. 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건 음악 자체다. 쓸모 없는 논쟁이다.

▲래피의 랩 철학 같은 게 있는지.

가사 안에 자기 철학을 넣어야 한다고 본다. 가볍게 내뱉고 싶진 않다.

▲친하게 지내는 래퍼가 있나. 아니면 주목하고 있는 래퍼가 있다면.

1세대에선 엠씨 한새(MC haNsAi)와 친하다.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디지(Deegie)와도 그렇고. 주로 이단들과 친하게 지낸다.(웃음) 그외 이전 세대 래퍼들관 두루 알고는 지낸다. 하지만 요즘 세대 래퍼들과는 연결고리가 없다. 그래도 허클베리 피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엠씨 한새(MC haNsAi), 래퍼 디지(Deegie)와 친분을 언급한 래피는 허클베리 피의 실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칭찬했다. 

▲그간 180여 곡을 만든 걸로 안다. 현재 음악 작업은 어떤 식으로 하나. 앞으로 계획은.

과거엔 혼자 다 했다. 지금은 래피 밴드가 있다. 아무래도 출신 성분이 밴드라.(웃음) 마음과 경제적 여유가 생기다 보니 후배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일거리가 들어오면 기본 뼈대를 제가 만들고 편곡 하는 동생에게 넘긴다. 그렇게 완성된 곡은 다시 수 십 명에 이르는 래피 밴드가 연주, 녹음한다. 외부 세션은 코러스만 쓴다. 래피 밴드는 결국 저만의 일자리 창출 방법인 셈이다. 제 음악은 앞으로 여유를 갖고 작업할 생각이다.

글·인터뷰 / 김성대 (본지 편집장·대중음악평론가) 사진 / DJ래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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