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인, 추전 김화수 선생
사천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인, 추전 김화수 선생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5.2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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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에게 한학공부 배워...부산, 서울 오가며 명성 떨쳐
미국 백악관도 작품 소장, 일본황실서 '국화훈장' 수여
2003년 고향 사천으로 돌아와 다도, 한학 등 전파
사천은 유학의 고향 "학덕 겸비해야 사천이 사천다워져"
사천 출신 추전 김화수 선생이 자신의 대표작인 '왕죽 연결 병풍' 앞에 앉았다. 사진=김성대 기자.

"인생이 왜 태어났느냐.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서.

인생이 왜 사느냐. 현자를 만나기 위해서.

왜 죽느냐. 아름다운 여운을 남기기 위해서." - 추전 김화수 

추전 김화수 선생은 한학자이자 화백이며 서예가 겸 차인이다. 그는 조부인 회정 김희곤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효당 최범술 선생과 육천 안붕언 선생, 소원 이수락 선생, 동강 조수호 선생 등으로부터 다도와 한학, 서예와 죽(竹)그림을 익혔다. 합천 해인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불경 공부도 한 추전 선생은 29세 되던 1976년 6월 부산 대청동에 자신의 호를 딴 추전서당을 열었다. 서당에는 지식인과 문화인사, 국악인, 그리고 3대 군수 기지 사령관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모여 소통·교류했다. 그러면서 추전서당은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과 해양소년단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82년 선생은 7년 부산생활을 접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간 추전은 4서3경을 주로 강의했고, 문인화와 다도도 틈틈이 가르쳤다. 문화공보부 초대전, 경복궁 전통 공예관 부채 초대전, 롯데호텔 사파이어룸 시서화전, 서울시청 부채전람회 등에 자신의 작품들을 출품한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문화부장관인 이어령 감사패와 문예진흥원장이었던 문득수 공로패를 비롯해 많은 상들을 거머쥐기도 했다. 일본 황실은 그런 추전에게 국화 훈장을 수여했고, 미국 백악관과 국무부도 그의 그림을 편애했다.

이만기와 이준희, 이봉걸과 강호동 등 천하장사들에게 왕죽도를 그려주고 부산KBS 라디오 ‘오륙도 잠망경이라는 사회 고발 프로그램도 진행한 추전 선생은 2003년 건강 문제로 고향 사천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머물고 있다. 고향에 머물며 그는 서울과 경북 고령, 진주 사람들에게 <장자>를 가르치고 부산에선 다도와 고전 강의를 한다.

추전 선생은 인성을 회복하는데 가장 중요한 학문을 한학으로 꼽는다. 한문을 배우다 보면 그 속에 문(文), 사(史), 철(哲)이 다 들어있어 익히다 보면 자연스레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얘기다. 최근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는 정기룡 장군에 관한 소설을 탈고한 그는 자신의 고향 사천을 일컬어 '유학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삼천포, 노산공원, 호연재 등에 스민 공자·맹자의 은근한 흔적이 주장의 근거였다.

▲조부님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고 들었다.

그렇다. 그믐 회(晦), 정자 정(亭) 회정 김희곤 선생이 내 조부님이셨다.

▲뿐만 아니라 효당 최범술 선생, 당대 최고 한학자였던 육천 안붕언 선생과 소원 이수락 선생, 경복궁 흠경각 현판을 쓴 동강 조수호 선생 등에게서도 한학과 다도, 서예와 죽(竹)그림을 배운 것으로 안다. 합천 해인사 불교전문강원에선 불경 공부도 했다고.

60~70년대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조부님의 가업과 가통을 잇기 위해 죽기 살기로 했다.

▲29세 되던 1976년 6월 부산 대청동에 선생님의 호를 딴 추전서당을 열었다.

할 일이 그것 밖에 없었다. 배운 게 그것 밖에 없었고. 한학을 공부했으니까 서당이라는 간판을 갖고 부산 문화계에 한 번 뛰어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서예가 유행하던 시대여서 서예 학원이 많았다.

▲부산 신신예식장에서 무료 수요시민서당 개설 등을 두고 “60년 만에 도심에 서당이 등장했다”며 당시 언론들이 흥분했다고 들었다.

그 시절 서당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식인, 문화인사, 3대 군수 기지 사령관들까지. 그 중엔 국악인들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음악 하던 사람들이 못 먹고 살던 시절이라 그 사람들을 위해 음악 모임 하나 만들어줘야겠다 싶어 탄생한 것이 바로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이다.

▲1982년에 7년 부산생활을 접고 서울로 향했다.

사람들이 “좁은 부산에 있지 말고 속히 서울로 가라”며 마음을 들뜨게 했다. 한날이라도 더 젊을 때 서울로 가라는 것이었다. 더 큰 인물이 될 거라면서.

▲서울로 가선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 3층에서 한학과 더불어 문인화 보급에 힘쓴 걸로 안다. 특히 선생의 부채그림은 전문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고.

<주역>, <시역>, <서경>, <논어>, <맹자> 등 4서3경을 주로 강의했다. 문인화와 다도도 틈틈이 가르쳤는데 문화공보부 초대전, 경복궁 전통 공예관 부채 초대전, 롯데호텔 사파이어룸 시서화전, 서울시청 부채전람회 등에 작품을 출품했다. 인사동 거리 축제 때는 현장에서 직접 실연도 했다.

추전 선생이 일본 황실로부터 받은 국화 훈장. 사진=김성대 기자.
추전 선생이 일본 황실로부터 받은 국화 훈장. 사진=김성대 기자.

▲대한민국 초대 문화부장관인 이어령 감사패와 문예진흥원장이었던 문득수 공로패를 비롯해 많은 상들을 받으셨다. 일본 황실은 국화 훈장도 전달했던데.

제1회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 출품한 내 작품을 일본 황실 관계자가 보고 요청을 해왔다. 당시 엑스포 분위기는 정말 대단했다.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 강호동 등 천하장사들에겐 왕죽도를 그려주셨다고.

왕 노릇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웃음) 기왕 그리는 거 스케일이 큰 걸 그려야 하지 않겠나 하고. 죽의 꿋꿋한 기상을 세상에 펴 사람들로 하여금 줏대를 갖게 하고 절제와 지조를 함양케 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과거 라디오 방송 진행도 하신 걸로 안다.

부산KBS 라디오 ‘오륙도 잠망경’이라고, 사회 고발 프로그램이었다. 1979년 부산에선 부산MBC 라디오 ‘홈런출발’ ‘자갈치아지매’가 지역을 휩쓸던 시절이었는데, 조창훈 당시 부산KBS 사장이 ‘오륙도 잠망경’을 편성해 청취율 탈환을 노렸다. 신문사 논설위원, 화랑 대표 등을 섭외해 방송을 해봤는데 신통치 않아서 조계식이라는 유명 아나운서가 저를 추천한 거다. 합격을 했고 2년 동안 방송을 진행했다. 아침 7시~7시30분, 멘트가 7개 들어가는 30분짜리 방송이었다.

▲2003년 고향 사천으로 돌아오셨다. 오신 이듬해 하동 청학동에 '청학춘추문화서당'을 열었다.

청학춘추문화서당은 내가 열었다기보단 출강을 한 것이다. 당시 김봉곤이 "큰 어른이 뭣하러 왔느냐" 말하기도 했는데, 그가 몽양당을 지을 적엔 조감도를 그려주기도 했다. 고향인 사천으로 낙향한 건 건강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다솔사에서 추억도 있고 해서 차로 유명한 다솔사 밑에 안착한 것이다.

▲추전서당엔 지금도 교육생들이 찾아오는가.

경북 고령과 진주 등지에서 <장자>를 공부하러 찾아오는 분들이 있다. 서울에서도 온다.

▲강연 등 바깥 활동도 꽤 하시는 걸로 안다.

부산에서 다도 강의, 고전 강의를 한다. 작년과 올해 고령문화원에선 장자 강의도 했다.

▲언젠가 서당을 "기초학문과 학덕을 수련하고 연마하는 곳"이라고 했다. 또 하늘이 인간에 부여한 최고 가치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즉, 오성(五性)을 잘 갈고 닦아 훌륭한 인품과 인격을 형성시키고 승화시키는 것이 서당이 할 일이라고 하셨는데. '오성' 하니까 한국 다도의 큰어른 아인 박종한 선생이 떠오른다.

박종한 선생은 나보다 인생 선배다. 서부경남 지역 차의 대가이시고. 생전에 몇 차례 찾아봬 차에 관해 내가 챙기지 못한 것들을 물어도 보고 고견도 듣곤 했던 분이다. 차 계통의 큰 선배라고 하면 맞겠다. 개인적으론 한국 차의 산맥을 전국 단위로는 효당 최범술 선생, 부산에선 금당 최규홍 선생, 그리고 서부경남에선 아인 박종한 선생에게서 본다. 세 사람은 한국 근대 차문화의 3대 산맥이라 할 만하다.

2008년 4월 미주한인청소년재단이 주최한 '재단 기금 모금을 위한 추전 김화수 화백 초청 전시회'와 2009년 10월 한국스페셜올림픽조직위원회가 주최한 '지적발달장애우를 위한 기금마련 추전 김화수 화백 초대전' 카달로그.(사진 위) 그 아래 2018년 열린 '제13회 부산다도 문화축제' 카달로그와 한국차문화교수협의회가 2019년 4월25일 창간한 <오심지차>에 추전 선생이 쓴 축사가 보인다. 사진=김성대 기자.  

▲과거 <성경>에 빗대 "한글이 신약이라면 한문은 구약이자 고전"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왜 한학을 배워야 하는가. 

한학은 인성을 회복하는데 가장 중요한 학문이다. 한문을 배우다 보면 그 속에 문(文), 사(史), 철(哲)이 다 들어있어 익히다 보면 자연스레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유교의 대표적 인격 완성체가 바로 군자와 선비다. 군자와 선비는 한학에 밝다. 특히 선비는 의리에 강한 사람이다. 글 잘 하는 사람은 선비가 아니다. 그건 '글쟁이'일 뿐이다. 선비라면 의리에 강하다.

▲그렇다면 선생께서 생각하는 최고의 선비는 누구인가.

단 한 사람의 선비를 꼽는다면 단연 포은 정몽주 선생이다. 그는 고려가 망해가는데도 끝까지 고려 왕조를 지키려, 지속시키려 노력한 사람이다. 의리가 있었던 것이다. 글 공부로 입신양명 해 월급 타고 배불리는 사람들은 선비라는 타이틀은 붙이되 제가 보기엔 '식충'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인기에 영합하고 권세에 빌붙는 그들은 옳은 선비가 아니다. 자고로 군자란 무소불통(無所不通, 통달하지 않는 곳이 없다-편집자주)이어야 한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자문위원, 대한민국 신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한국 미술협회 회원, 경남문학회 회원 등으로도 활동하셨다. 월간 <미술세계>와 <주간미술>에선 미술평론(83~85년)도 하셨는데.

평론은 안 한다. 평론을 하면 적이 생기기 때문이다. 평론에는 봐주기 평론이 있고 평론을 위한 평론이 있는데, 평론을 하면서 봐주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곧이곧대로 써야할 때도 있는 법인데 그러면 상대로부터 적대감을 사게 마련이다. 그래서 평론은 더는 하지 않는다.

추전 선생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추전미술관은 추전서당과 함께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길에 위치해 있다. 사진=김성대 기자. 
추전 선생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추전미술관은 추전서당과 함께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길에 위치해 있다. 사진=김성대 기자. 

▲소설 <주역>(전 3권)을 써 소설가로 변신 후 소설 <의천대각국사>와 <진감국사>, 소설 <유관 하정공 일대기>를 쓰신 걸로 알고 있다. <언어와 문자의 고향>, <한시집> 등 한문집 수 백편을 번역했고 <어찌하여 물이 흐를 때 꽃이 피는가>, <대천을 건너므로써 이롭느니라> 같은 수필집도 쓰셨다. 책 집필은 지금도 하고 계신지.

황희 정승, 맹사성과 더불어 '조선 3대 청백리(淸白吏)'에 포함된 하정공 유관에 관한 소설은 문화 유씨 문중의 부탁으로 쓴 적은 있지만 피치못할 사정으로 출간은 되지 않았다. 최근엔 정기룡 장군에 관한 소설을 탈고했다. 16세기 조선 바다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장군이 있었다. 그는 63전 63승 무패 완승을 거둔 조선조 최고의 명장이다.

▲미국 백악관과 국무부, 중국 항저우대학과 사천성미술관 등에도 선생의 작품들이 걸려 있다고 들었다. 전시는 일본, 미국, 호주, 뉴질랜드, 중국, 태국, 싱가폴, 인도, 우즈베키스탄, 요르단, 터키, 유럽 등 거의 전세계에서 이뤄졌고 SBS드라마 <장희빈>과 MBC드라마 <제3 공화국>에도 작품을 지원한 것으로 안다. 또한 한국신미술협회 해외전시엔 195차례 전시 모두에 출품을 했다고.​​​​​​

76~82년까지 군인들이 득세하던 시절 '별'들이 제 서당을 많이 찾아와 배우고 묻곤 했다. 이는 해양소년단을 창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제가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 그들이 외국으로 나갈 땐 반드시 제 작품을 갖고 가 현지 사람들에게 선물 했다고 한다. 백악관과 국무부의 제 그림들도 그런 과정을 거쳐 미국의 모 장군이 건 것으로 안다. 지금은 일본 오사카 갤러리에서 제 작품을 전시 중이고, 5월 말까진 부채도 전시할 예정이다. 불교방송에선 제 작품들로 영상 갤러리도 준비 중이다.

2011년 4월, 당시 산청문화원장이었던 김태훈 동양당한약방 원장의 후원으로 추전 선생이 2010년 가을부터 세 계절을 거친 끝에 완성한 신의 유의태 선생과 의성 허준 선생의 일대기 48장면. 사진=김성대 기자.

▲바야흐로 인문학이 유행하는 시대다. 한학자로서 어떻게 보시는지.

사람들은 한학이라 하면 괜히 무겁게 생각한다. 반면 인문학이라 하면 듣기에도 가볍다. 저는 시대적으로 인문학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전문학을 모르면 인문학이란 살림살이와 그 깊이는 얕을 수 밖에 없다. 인문학을 통해 닿아야 할 귀착지는 결국엔 고전문학이다.

▲2003년 공자 말씀으로 낙향의 이유를 대신했다.

"우리 고향 젊은이들이 퍽이나 진취적이고 활동적이기는 하지만 인생을 재단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 아쉽기 때문에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쳐야겠다”는 말이었다. 공자께서 고국인 노나라로 돌아오며 한 그 말이 당시 내 상황에 적합해보였다.

▲마지막으로 고향 사람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공자님이 제자들을 가르친 장소가 '사수'라는 강가였고, 신라 경덕왕 때 사천을 '사수군'이라 했다. 사천의 이구산은 공자가 태어난 산 이름과 같다. '삼천포'는 공자의 제자들이 3천명 있다 해서 지어진 지명과 같은 이름이다. 사천 노산공원에선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가 보이고, 사천 호연재에는 맹자 사상의 핵심인 '호연지기'가 아로새겨져 있다. 이렇듯 사천은 유학의 고향이었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공부를 덜 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학문을 하고 공부를 하고 유서 깊은 도학에 빠져야 사람으로서 품위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야 타지역 사람들도 사천 사람을 무시못할 것이다. 제가 사천문화원에서 주역과 사군자 강의를 한 일, 사천다우회를 창립한 것도 다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 행한 일이다.

얼마전 사천의 한 경로당에 가서 특강 30분을 하며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 얘길 했다. 공자 말씀으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나라가 잘 되고 정치가 잘 된다는 얘기다. 저는 이 말을 조금 바꿔 "노인은 노인다워야 하고 젊은이는 젊은이다워야 한다"고 했다. 학덕과 노덕 즉, 나이든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덕망이 있어야 젊은이들이 따르고 숭배하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공부를 해야 한다. 돈 많고 권력 높은 것은 일시적일뿐더러 때로는 사람에게 강압적으로 다가설 수 있다. 학덕을 겸비할 때 노인이 노인다워지고 사천이 사천다워진다.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김성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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