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와 목표를 중시하는 삶' 김병윤 세무회계사무소 대표
'순리와 목표를 중시하는 삶' 김병윤 세무회계사무소 대표
  • 김성대 편집장
  • 승인 2019.07.29 09: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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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유림면 출신, 목포해양대 항해학과 졸업
부친 부재로 무너진 집안 일으키려 항해사 시작
1980년대 이란 이라크 전쟁 땐 용병에도 지원
12년 세무직 공무원 생활 접고 2002년 세무사 개업
지난 6월 대한민국 신지식인 지역발전대상에 선정
시조창 명인에 해금도 다뤄...취미는 오토바이 타기
목표 중시하는 사마천 존경, '순리대로 살라'는 노자 말 중시

평거동 김병윤 세무회계사무소의 김병윤 대표는 함양군 유림면에서 태어났다. 목포해양대학교 항해학과를 졸업한 그는 5년간 5대양 6대주를 다니며 항해사 생활을 했고, 80년대 이란 이라크 전쟁 땐 페르시아만에서 이란 원유를 실어 나르는 임무를 띤 용병에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0년 8월 김 대표는 세무직에 도전했고 제주세무서에서 세무직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진주와 부산에서 12년간 공무원 생활을 이어간 그는 "공무원 박봉으로는 집안을 일으켜세우는 데 한계를 느껴" 2002년 12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세무사를 열고 사업가로 돌아섰다.

할리 데이비슨 스프링거를 타며 자유를 만끽하길 즐기는 김병윤 대표는 목표한 것은 반드시 이루려 한 사마천을 좋아하고 '순리대로 살라' 가르친 노자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또한 그는 전국명창대회에서 최소 5차례 장원이 돼야 오를 수 있는 시조창 명인이기도 하다. 올해로 재진주함양향우회장을 3년째 맡고 있으며, 진주카네기 총동문회장직은 2년차에 접어들었다. 2년 동안 맡아온 진주지역세무사회 회장직은 지난 6월 30일을 끝으로 내려놓았다. 그는 올해 6월 14일 한국신지식인협회가 주최한 ‘대한민국 신지식인 인증식’에서 신지식인 지역발전대상에도 선정됐다. 대한민국 신지식인은 중소기업·벤처·특허·농업 등 20개 분야에서 4차 산업혁명시대의 핵심인 지식정보 공유를 통해 해당 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이루고 베푸는 삶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김병윤 세무회계사무소' 김병윤 대표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병윤 대표는 5년간 항해사, 12년간 세무직 공무원 생활을 하고 2002년 12월 자신의 사무소를 차려 여기까지 왔다. 사진=조현웅 기자.
김병윤 대표는 5년간 항해사, 12년간 세무직 공무원 생활을 하고 2002년 12월 자신의 사무소를 차려 여기까지 왔다. 사진=조현웅 기자.

▲함양군 유림면이 고향이다. 어떤 곳이었고 가정 환경은 어땠나.

제가 1964년생인데,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다. 부친께선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작고하셨다. 어느 집이든 아버지 노동력이 최고 재산이었던 시절이었으니 모친께서 고생이 많았다. 가난했던 땅. 그래서 고향에 더 애착이 간다. 

▲목포해양대학교 항해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마린과 홍콩 아이엠씨(I.M.C)에서 2등 항해사로 오랜 시간 근무한 걸로 안다.

따지고 보면 가난이 거기까지 연결된 것이었다. 제가 바다에 간 건 아버지의 부재로 무너진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였다. 기숙사의 공짜 밥, 주는 제복. 돈이 없는 나에겐 최고의 조건이었다. 물론 항해사로서 수입도 좋았다. 도쿄마린, 홍콩 아이엠씨를 거치며 5년간 5대양 6대주를 다녔다. 

▲항해사는 위험한 직업이다. 힘든 적은 없었나.

태평양과 대서양, 인도양이 저의 작업장이었다. 20대 때 한 번은 브라질 아마존강 도시 벨렘에서 열대 원목을 싣고 영국 템즈강이 있는 리버풀로 항해 한 적이 있다. 15일 일정의 항해였고 첫 출항은 순조로웠다. 그렇게 목적항 도착 하루 반나절을 남겨두고 포르투갈 앞 '악마의 바다'로 불리는 비스케이만 입구에 다다랐다. 그곳은 위도 50도의, 유명한 편서풍이 1년 내도록 불어대는 북태평양의 그야말로 '죽음의 바다'였다. 기상 정보가 불투명했던 시절, 고요했던 날씨가 일순 폭풍우로 바뀌었고 우리는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 원목을 묶고 있던 쇠사슬도 파도에 끊기고 배는 침몰 직전이었다. 구조요청을 보냈지만 누구도 대답이 없었다. 9초 간격으로 배는 바다에 잠겼다 수면 위로 올라왔다를 반복했다. 9초의 죽음과 9초의 삶을 오가는 생사의 갈림길. 그런 식으로 하루면 통과할 곳을 7일이 걸려 통과했다. 나중에 그 18초를 7일로 환산해보니 결국 33,600번을 살고자 소망했던 것이었다. 정말 간절히 소망하면 살 수 있다는 걸 저는 20대 때 알았던 것이다. 

▲이란 용병에도 지원했었다고.

80년 9월부터 88년 8월까지 이란,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었다. 저는 페르시아만에서 이란 원유를 실어 야간 이라크 공군 공격을 뚫고 나오는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부산에서 신체 검사를 마치고 현장 적응 교육 중에 갑자기 전쟁이 끝나버렸다. 말 그대로 '지원'에서 멈춘 일이었다.

▲1990년 4월에 세무사 직에 도전, 그해 8월 세무공무원이 됐다.

바다에서 생활하다 28살 정도 때 결혼을 생각했다. 상대(지금의 아내) 집안에 인사를 갔는데 배 타는 사람을 누가 사위로 맞겠나. 항해사는 안 된다, 대신 공무원이면 생각해보겠다고 하셨다. 알고보니 장인될 어른이 면장까지 지내셨더라. 다행히 경상대학교에 다니던 주변 친구들이 공무원 준비를 많이 하고 있던 터라 뭘 준비하면 좋겠냐고 물어볼 수 있었다. 세무 공무원이 칠 만 할 거다 해서 그럼 그걸 해보자 결정했다. 물론 쉽진 않았다. 외국을 많이 다녀 영어는 잘 했지만 회계학이 어려웠다. 그래서 경상대 회계학과 친구들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정작 그 친구들은 낙방하고 저만 합격을 했다. 지난번 신지식인 상을 받으러 서울에 가 그 친구들 중 한 명을 만났다. 잊고 산 줄 알았는데 그때 미안했던 마음이 아직 내 안에 있었다.

▲첫 부임지가 제주세무서였다. 진주세무서와 부산지방국세청 등에선 도합 12년을 근무했는데.

제주는 잘 모르는 곳이었다. 아파트 기숙사가 있었고 동료들과 함께 근무했다. 그러다 1, 2차로 나뉜 발령 희망지에 저는 1차로 진주를 썼다. 부산은 진주에 있다 옮겨간 곳이다. 90년 8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일이다.

▲자신의 이름을 건 세무회계 사무소를 바로 그 2002년 12월 진주에서 열었다. 왜 진주였나.

제가 동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진주는 제2의 고향인 셈이다. 진주는 아내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진주시 평거동에 있는 '김병윤 세무회계사무소' 전경. 사진=김병윤 제공.

▲이후 세무사 시험을 보고 사업가로 변신했다.

공무원 박봉으론 무너진 집안을 일으킬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공무원 생활 5년 동안 주말, 명절도 놀지 않고 공부했다. 하동 악양과 산청 묵계 사이 청학사라는 절이 있는데 하동세무서에 지원해 낮에는 세무서 근무, 밤에는 청학사에서 스님들과 공부했다. 저 스스로 낮엔 공무원, 밤에는 스님이라는 뜻으로 '주공야승'이라는 말을 지어보기도 했다.(웃음) 물론 나이들어 공부하는 게 쉽진 않아 처음과 두 번째 모두 낙방했다. 두 번 떨어지고 보니 많이 지치고, 용기도 의지도 바닥이 나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부르더니 돈을 한 뭉텅이 주더라. "10년 넣은 보험 깬 건데 난 당신이 합격하리라 500% 믿어." 그 돈을 받고 다음해 열린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를 한 경기도 보지 않고 공부했다. 그렇게 30대 세무공무원에서 40대 세무사 생활을 시작했다. 정확히는 39살에 회계사무소를 개업해 지금 50대 중반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쉽진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굉장히 힘들었다. 하동세무서에서 나와 8년을 부산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진주에서 개업은 녹록치 않았다. 수임장부가 단 한 건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그러다 2004년 진주카네기 CEO교육과정을 등록했는데, 교육과정 중에 '비전제시 시간'이란 것이 있었다. 저는 '3351'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3년내 3등하고 5년내 1등 하자." 공간으로 치면 지리산에서 낙동강까지다. 저는 이 비전을 실현하려 노력했고 결국 이뤄냈다.

▲그 시절 에피소드 하나만 소개해달라.

건수 계약을 위해 하루에 저녁을 5번 먹고 배터져 죽을 뻔 한 적이 일주일 5차례 있었다. 한날은 평거동에서 잘 나가던 스포츠 맛사지 업체와 계약을 하고 업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분위기가 아리송해 "어떻게 수입을 올리냐" 물어보니 불법안마시술소였다. 그날로 그 건수는 해임했다. '3351'이 아무리 중요해도 아닌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덕적 기반을 두지 않는 성공은 모래성에 불과하다. 또 진주에서 가장 크다는 S교회를 방문해 "건수를 몰아주신다면 독실한 기독 신자가 되어 이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결국 그 말을 지키진 못했지만. 목사님껜 죄송한 마음이다.

▲세무회계 일은 본인에게 맞나.

세무회계는 시간이 자유로운 업이다. 물론 전체 업무를 보긴 하지만 의사나 변호사처럼 내가 직접 대면업무를 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사무장에게 얘기를 듣고 종합적인 판단과 지시로도 할 수 있다. 대신 고민은 많은 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무회계를 '고민 대행업'이라 부르기도 한다.(웃음)

▲지난 6월 14일 한국신지식인협회 주최 ‘대한민국 신지식인 인증식’에서 신지식인 지역발전대상에 선정됐다. 어떤 상인가. 

이 상의 핵심가치는 도전, 혁신, 창조, 나눔이다. 제 경우 신지식인 협회에서 도전과 나눔 쪽을 본 것 같다. 항해사에서 세무회계사로 직업을 바꾼 것 자체가 도전이니까.(웃음) 특히 '나눔'은 저희 직원(15명) 전체가 동호회를 만들어 익힌 국악을 재능기부 한 것에서 평가받은 듯 싶다. 이 일들로 직원 한 명 한 명이 자부심을 갖게 되고, 그 자부심이 다시 매출 신장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동종 업계에서 진주 1등이 됐고, 번 돈 중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돈이 좀 있으니 나눈다는 게 아닌, 직원들과 함께 전체를 두루 나누고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

김 대표는 지난 6월 14일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을 받기도 했다. 사진=조현웅 기자.
김 대표는 지난 6월 14일 한국신지식인 협회가 주최한 '대한민국 신지식인 인증식'에서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을 받기도 했다. 사진=조현웅 기자.

▲시조창 명인이기도 하다.

명인은 전국명창대회에서 최소 5차례 장원이 돼야 한다. 갑부, 을부, 사설부, 지름부, 명인부. 시조창을 해서 나중에 인간문화재가 되는 게 꿈이다.

▲은퇴 후 노인복지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2005년 순천 명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해 화제를 모았다.

해보려고 했는데 현장 실습을 가보니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이 일반적인 마음만 갖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명감 없인 할 수 없는 일이라 판단해 미뤘다. 앞으로 하긴 할 거다.

▲살아오면서 가장 영향받은 인물. 좋아하는 책이 있다면.

사마천이다. 그는 부친 때부터 역사서를 써온 집안에서 자라 역사서를 쓰겠다는 자기 목표가 확고했던 사람이다. 흉노군에게 패해 진노한 한무제의 심기를 건드린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에게 주어진 세 가지 선택지(벌금 50만전, 궁형 또는 사형) 중 그가 궁형을 선택한 이유도 목표했던 역사서를 써야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표를 정하면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좋았다. 저 역시 정했으면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근래 읽은 책들 중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인상적이었다. <사피엔스>는 기존 역사서와 달리 과학적이다. 과학을 토대로 인류 전반을 두루 다뤘다. 감동적인 내용이 많았다.

▲좌우명이 '순리대로 살라'는 노자의 말인 것으로 안다.

젊은 시절 가훈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었는데 나이가 들어선 '도법자연'으로 바뀌었다. 순리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삶이라는 느낌이 들어서다. 산청 청계리에 낙서재라는 집을 지었는데 거기 정자 이름이 없을 '무' 할 '위'를 쓴 무위정이다. 늘 인위가 아닌 무위로 살려 노력한다. 같이 더불어 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엔 노자가 맞는 것 같다.

▲호는 거연(居然)이다. 듣기론 주자의 시 '정사잡영(精舍雜詠)' 12수 중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딴 것으로 아는데.

고향 함양에 '거연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젊은 시절 많이 찾았던 곳이다. 자연에 산다는 뜻이다.

지난 6월 열린 '대한민국 신지식인 인증식' 현장에서. 사진=김병윤 제공.
'진주의 거연정' 앞에서 해금을 연주하고 있는 김병윤 대표. 거연(居然)은 그의 호이기도 하다. 사진=조현웅 기자.

▲11년째 취미가 오토바이다. 할리 데이비슨 2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엔진에서 말발굽 소리가 나는 할리 데이비슨 스프링거를 탄다. 한국에 30대 정도 있다고 들었다. 지금은 체력이 안 돼 1대를 팔았다. 오토바이를 타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이대로 끝까지 달리고 싶다는 무념무상으로 빠져든다. 엄청난 속도 속에서 모든 생각이 날아가버린다. 한때는 오토바이 외에도 제트 스키, 모터 보트. 윈드 서핑도 했다. 

▲앞으로 삶의 계획, 목표 같은 게 있다면. 

목표 설정을 가장 중시한다. 50대 때 이루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중국 역사를 인간적 관점에서 다시 쓰는 것이다. 이 역시 사마천의 영향일지 모르겠다. 기존 관련 책들을 참고해 인문학적인 접근을 감행하며 지금 쓰고 있다. 다른 계획은 지역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장학재단이나 복지법인을 설립해 혜택 받은 것을 돌려주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좋은 인간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김성대 본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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