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거인들] 서정가요의 제왕, 남인수
[경남의 거인들] 서정가요의 제왕, 남인수
  • 고종석
  • 승인 2019.02.0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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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수의 노래 실력은 전성기 시절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평을 들었다.

남인수는 ‘서정가요의 제왕’으로 불리며 1930년대부터 195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였다. 남인수의 노래 실력은 전성기 시절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으며, 3옥타브를 넘나들면서도 온화하게 스몄던 그의 노래들은 일제강점기 조선 백성의 눈물보를 자극했다. 곧은 인상에 굵지만 낭창한 목소리가 연상되는 남인수는 1918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진주인 최씨 집안에서 태어났던 남인수는 모친의 재혼으로 이름을 강문수로 바꿔야 했다. 1936년 당대를 대표했던 작곡가 박시춘에 의해 가수로 데뷔한 남인수의 데뷔곡은 시에론레코드에서 제작한 ‘눈물의 해협’이다. 김상화의 시에 박시춘이 곡을 붙여 발표되었던 이 당시 그의 이름은 남인수가 아닌 강문수였다.

이후 황금심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던 이부풍이 노랫말을 개사하고 1937년에 재취입한 ‘눈물의 해협’은 남인수를 대표하는 명곡 ‘애수의 소야곡’으로 제목과 가수명이 바뀌어 발표되었다. 지금까지 나훈아와 박일남, 주현미를 포함한 120여 명 가수가 리메이크했던 ‘애수의 소야곡’은 전통가요 가수라면 가장 먼저 섭렵해야 할 대표적인 대중가요이다. 무엇보다 ‘애수의 소야곡’은 식민지의 설움과 시대적 아픔보다 남녀 간 사랑에 초점을 맞춘 곡이었다. 엄밀히 이 곡은 박시춘과 남인수 콤비의 첫 히트곡이었으며, 일제강점기 전후를 대표하는 음반사 오케레코드의 전성기를 이끈 노래이기도 했다. 애절한 가락과 함께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면서 우수에 젖어 있는 체념적인 내용을 담은 ‘애수의 소야곡’은 남인수 고유의 미성이 뚜렷하게 새겨진 명곡이다.

그의 또 다른 명곡은 군 위문활동을 다니던 곳 중 한 곳인 피난지 부산을 기억하며 탄생했다. 1953년 유니버샬레코드에서 발매된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에 발표되었으며, 환도하는 피난민들의 애환을 절절하게 담아낸 곡이다. 어수선했던 당시의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이 노래는 10만장이 넘는 판매기록을 세웠다. 또한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1958년 LP시대가 열리면서 10인치와 12인치로 재발매되었고, 이후 음반 미디어가 변화할 때마다 어김없이 재발매 되었다. 

대한가수협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남인수는 1962년 45세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984년 ‘남인수 노래 기념비’가 진주시 판문동 진양호 내에 세워졌으며, 2001년 남인수 기념사업회에서 남인수를 기리기 위해 같은 자리에 남인수 동상을 세웠다. 매년 10월 개천예술제 기간에 열리는 진주가요제는 1996년부터 시작된 ‘남인수 가요제’를 전신으로 한다. 이 가요제의 명칭 변경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남인수의 이름이 등재되었기 때문이다.

한창 활동할 나이에 세상을 떠난 명가수 남인수의 장례식에 쓰인 노래는 ‘애수의 소야곡’이었다.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애수의 소야곡에 아직도 스며있는 가사 중 일부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 군국가요를 불렀던 그의 행각을 차라리 잊고 싶지만, 대중가요를 상징했던 명가수 남인수의 음악은 어떠한 방식이건 분명히 기억되어야 하겠다.

고종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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