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거인들] 함양상림을 조성한 신라시대 문신, 고운 최치원
[경남의 거인들] 함양상림을 조성한 신라시대 문신, 고운 최치원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10.10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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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최치원의 초상화. 정읍 무성서원 소장.

최치원은 신라 말기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 제47대왕인 헌안왕 원년(857년)에 신라 6부 중 하나인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 신분으로 태어났다.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최치원은 신라 말 삼최(三崔) 중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에 들기도 했다. 868년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뒤 당나라 관료로도 생활했던 최치원은 현재 경주 최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경주 출신인 최치원이 함양과 인연을 맺은 건 진성여왕 8년(894년) 시무 10여 조를 상소해 6두품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으로 임명되면서부터다. 그 시기 최치원이 천령군 즉, 지금의 함양 태수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런 최치원의 관직을 <동국여지승람>은 ‘방로태감 천령군태수 알찬’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 지금 함양군에는 최치원이 태수로 재직하던 시절 올라가 노닐었다는 학사루가 있고,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최치원이 직접 조성했다는 함양상림도 있다.

진성여왕의 아찬 임명에 귀족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모습에 난세를 비관, 관직을 내려놓은 최치원은 경주 남산, 강주(현 영주시) 빙산,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의 별서 등에 머물다 마지막엔 가족과 함께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했다. 최치원은 바로 그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

최치원은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 현종 14년엔 문창후라는 시호가 추증됐으며 문묘에 종사됐다. 또한 경주의 서악서원, 태인 무성서원, 영평 고운영당, 함양 백연서원 등에도 제향됐다.

정리 김성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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