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거인들] 목화씨 들여와 백성을 이롭게 한 의복의 혁명가, 문익점
[경남의 거인들] 목화씨 들여와 백성을 이롭게 한 의복의 혁명가, 문익점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1.23 17: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가 원에서 숨겨와 보급한 목화는 고려·조선 의생활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다줬다. 사진=문익점 초상화.

 

문숙선의 아들 문익점(文益漸, 1331~1400)은 강성현(지금의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충청도 출신 유학자 이곡에게 글을 배운 그는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해 김해부사록과 순유박사를 지냈다. 1363년 문익점은 사간원 좌정언으로 일하다 기록관 자격으로 계품사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로 갔다. 원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인 최유가 공민왕을 몰아내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던 때라 당시 고려와 원의 관계는 불편했다. 원에 머물던 덕흥군을 고려왕에 봉하고, 군사 1만 명으로 랴오둥까지 진출한 원은 그러나 최영 장군 앞에서 자신들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문익점은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온 뒤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파직됐다. 관직에서 물러난 문익점은 원에서 돌아올 때 주머니에 숨겨 온 목화씨를 재배하기로 마음먹는다. 원에서 반출이 금지됐던 목화씨를 붓대 속에 감추어 왔다는 일화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돋우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씨를 심었는데 처음엔 재배에 서툴러 한 그루만 겨우 살렸다고 한다. 두 사람은 3년 노력 끝에 대량 목화 재배에 성공했다.

목화는 고려·조선 의생활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다줬다. 수입에 의존하던 목화를 국내에서 직접 재배하게 되면서 귀족들만 입던 무명옷과 솜옷을 더 많은 사람들이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고려 사람들은 양잠을 해 얻은 명주와 모시로 만든 저포, 삼을 길러 만든 삼베, 그리고 가죽옷 따위를 입었는데 명주는 만들기가 힘들고 모시옷감과 삼베는 겨울에 입을 수가 없었다. 무명과 솜 보급은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의생활 뿐 아니라 경제적 풍요도 함께 안겨주었다. 솜은 옷 외에 초나 화약의 심지로도 쓰였고 무명실은 노끈이나 낚싯줄, 그물 등 일상용품으로 다양하게 사용됐다. 무명은 훗날 조선 시대 물물교환 때 통화 수단으로 쓰이며 세금을 걷는 기본 통화가 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무명은 일본, 중국과 무역에서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기도 하다.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목면시배유지와 면화시배사적비. 이곳은 국내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곳이다. 사진=김시원 기자.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萊)는 실 만드는 기계를 만들어 보급했는데 우리가 아는 ‘물레’라는 이름은 바로 문래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명베’ 역시 문익점의 손자인 문영(文英)이 최초로 베를 짰다고 해 목면이 '문영베'로 불렸던 것에서 기원한 이름이다.

고향에서 10년을 보내고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고관 지위에 오른 문익점은 이성계 일파가 주장한 전제 개혁에 반대하다 조정에서 쫓겨났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삼우당(三憂堂)을 짓고 그걸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가 고향에 돌아온 지 3년 만에 고려가 망하고 이씨 왕조의 조선이 들어섰다. 문익점은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 병이 들었다고 전한다. 이성계는 사람을 보내 문익점을 두 차례 불렀지만 그는 끝내 거절하고 조용히 살다 세상을 떠났다.

문익점의 공로는 1440년 조선 세종 때 가서야 영의정에 추증되면서 인정받았다.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재배한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 면화시배지가 남아 있다. 면화시배지는 사적 제108호로 지정됐다.

정리 김성대 기자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