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거인들] 현실과 실천을 중시한 조선 중기의 대학자, 남명 조식
[경남의 거인들] 현실과 실천을 중시한 조선 중기의 대학자, 남명 조식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1.2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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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은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 이론 공부에 심취했던 이황과 달리 이론 논쟁을 비판하며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사진=남명 조식 초상화.

영남학파의 거두 조식(曺植, 1501년 7월10일-1572년 2월 21일)은 조선 전기 성리학자다.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조식은 아버지 조언형이 단천군수로 발령되자 따라가 단천에서 지내며 경전자사(經典子史)를 비롯해 천문, 지리, 의방, 수학, 궁마, 진법 등 유교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지식과 재능을 익혔다. 당시 자신의 정신력과 집중력, 담력을 시험하려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샌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고 크게 깨달아 성리학에 전념하게 된다. 이후 기묘사화에 충격을 받고 관직을 단념한 남명은(그는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561년 번잡한 김해를 떠나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성리학을 연구하는 등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30대 후반 남명은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세상의 찬사를 들으며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자리매김 한다. 유학자는 고답적인 이론에 매몰돼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실학적 학문관을 지향한 그는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나름의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했다.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조식은 성호 이익 같은 학자로부터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이라는 극찬을 듣기도 했다.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였던 남명은 조선 시대 다른 유학자들이 도교와 노장 사상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노자와 장자에게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본 몇 안 되는 학자였다. 내면의 수양을 뜻하는 '경'(敬)과 도의 적극적인 표출을 말하는 '의'(義)를 더불어 추구한 '경의학'을 학문의 핵심으로 삼은 조식은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 이론 공부에 심취했던 이황과 달리 이론 논쟁을 비판하며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16세기 학파 형성기에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 된 퇴계와 남명은 각각 경상좌도,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서 제자들이 동인 정파를 형성토록 했다. 하지만 영남학파를 바탕으로 한 동인 정파는 다시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나뉘는데, 수기(修己)하고 치인(治人)한 선비가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길을 간 퇴계와 달리 남명은 재야 지식인이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남명은 많은 제자들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와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 백 문도가 모두 그가 길러낸 인물들이다. 남명은 사후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1613년(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리 김성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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