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헤비메탈의 계절' 메쏘드, 콘 신보 외
[기고] '헤비메탈의 계절' 메쏘드, 콘 신보 외
  • 김성대
  • 승인 2019.10.2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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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서 겨울은 나에겐 '헤비뮤직의 계절'이다. 사진=소니뮤직, WINSTORY, Nuclear Blast, Roadrunner Records, 위시본 프로젝트, Union Steel 제공.

더는 반팔 옷을 입을 수 없는 계절. 늦가을에서 겨울은 나에겐 '헤비뮤직의 계절'이다. 헤비니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온몸이 더워지고 더워진 몸은 추워진 계절에 딱 그만큼만 맞선다. 재즈나 발라드, 알앤비의 정서적 온기가 아닌 육체적 열기를 헤비뮤직은 품고 있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 근래 들은 국내외 헤비니스 앨범들 중 괜찮은 6장을 추려보았다.

여전히 유효한 하드코어 변종들: 체인 리액션 & 킬스위치 인게이지

체인 리액션과 킬스위치 인게이지의 새 앨범을 들으며 하드코어 펑크 변종들인 스크리모와 메탈코어의 미래를 긍정할 수 있었다. 허무주의에 빚진 개인의 무력감을 각혈하듯 내뱉는 체인 리액션의 보컬은 'Vanish'와 'No One Understand', 'Noir Society'의 템포체인지와 어울리며 혼돈과 비정의 여운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헐거운 듯 매서운 긴장을 삼킨 악기 톤들, 각자 살결을 온전히 드러내는 기타와 베이스의 소리 균형은 기준과 법칙을 머금어 변칙과 무질서로 돌진하는 역설적 파열을 앨범 전체에 가하고 있다. 'We Wander'에서 가장 빛나는 양윤기의 드러밍은 그런 체인 리액션 신보의 중심이다. 임무혁, 문정배의 비정한 트윈 기타는 음들을 갈아마실 듯 일그러지며 그 중심을 철저히 에워싼다.

밴드의 전 보컬리스트 하워드 존스가 마이크를 잡은 'The Signal Fire'와 척 빌리(테스타먼트)가 가세한 'The Crownless King'을 앞세운 킬스위치 인게이지의 신보도 좋다. 언급한 두 곡 외 앨범에 실린 거의 모든 곡들이 베스트감이다. 매곡에서 으름장을 놓는 드럼의 돌진감이나 기타의 드라이브감 또한 그들 전성기였던 2000년대 초중반이 부럽지 않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앨범에서 큰 만족을 참 오랜만에 얻었다. 

정체성을 위한 음악적 마지노 선: 메쏘드 & 콘

어느새 한국 헤비메탈의 자존심 또는 청사진이 된 메쏘드. 'Circle Of Violence'의 빠른 더블 베이스 드러밍은 메탈리카와 테스타먼트, 쉐도우스 폴 사이 어딘가에서 자신들을 증명하는 신작을 시작부터 뒤흔든다. 멍키(James "Munky" Shaffer)가 돌아오고 거의 실패작이 없었던 콘은 그런 메쏘드와 함께 각자 정체성을 탐색하는 듯 스타일의 마지노 선을 설정한 신작을 비슷한 시기에 냈다. 콘은 [Untouchables]에서 멈춘 듯 했던 우람한 그루브를 신작에서 되살려냈고, 좀 더 정통 스래쉬메탈을 표방한 메쏘드는 '5492'에서 저마다 훅을 가진 리프들을 전시하며 한국 헤비메탈의 지름을 한 뼘 더 넓혔다. 그로울링 보컬에 집요하게 맞서는 싱코페이션 기타 리프, 그 안에서 나풀거리는 절망의 멜로디. 메쏘드와 콘은 여태껏 자신들이 일군 스타일을 앨범 한 장으로 몽땅 요약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뒤척인 흔적: 블랙홀 & 오페스

지나간 시간과 오지 않은 시간 사이에서 지금이라는 시간은 살찐다. 데뷔 30주년을 맞은 블랙홀에게 2019년은 각별한 해다. 날고 기는 후배 록밴드들이 자신들의 데뷔작을 통째로 해부해 헌정했고, 블랙홀은 그와 별개로 14년만에 새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팀의 시작과 현재를 동시에 펼쳐놓고 지난 30년을 반추할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블랙홀은 이미 복 받은 팀이다. 

블랙홀의 새앨범 [Evolution]은 'AI'라는 미래 과학으로 시작해 'UTOPIA'라는 미래 사회로 문을 닫으며, 밝고 평화로운 그것이 바로 우리의 'HOME'이 될 거라 역설한다. 사운드와 기타 리프, 보컬 멜로디 면에서 블랙홀의 신보는 [Turbo] 시절 주다스 프리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AC/DC처럼 특별한 이펙터 없이 플런저(Flanger)를 비롯한 앰프 자체 소리에 기대 "사람이 직접 연주하는 것이 미래 음악의 가치일 것"이라는 자신들의 가설을 납득시키려 고군분투 한다. 과거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인간의 삶과 인간이 처한 사회를 이들은 바라보고 있지만 그 정서는 전처럼 어둡지 않다. 지난 30년간 자신들이 부분적으로 겪었을 아픔만큼 성숙해진 블랙홀의 메시지와 사운드는 의외로 밝다. 물론 느슨한 몇몇 코러스 멜로디는 아쉽지만 오랜 경험으로 다져왔을 단단한 연주의 합은 그 자체로 듣는 이를 압도한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고민한 건 오페스도 마찬가지였다. 핑크 플로이드가 중세로 가 하드록을 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 'Dignity'는 이 밴드가 앞으로 갈 음악적 길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오페스의 과거를 사랑한 헤비니스 팬들은 여전히 그들로부터 데스메탈의 기운을 잡아내고 싶겠지만 더는 무모한 시도다. 테크니컬 데스메탈은 더이상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며, 따라서 그로울링이니 클린보컬이니 하는 분석 따위에서 그들 음악은 완전히 자유를 얻었다. 비슷한 성향의 툴(Tool) 신보가 변함없이 완벽에 대한 강박을 시전했다면, 오페스의 신작은 음산한 서사를 위한 논리를 재고했다. 재즈 교향곡 같은 'The Garroter'에서 이들은 그 서사의 논리가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천천히 펼쳐보인다.

얼마전 SNS에서 "평론은 쉽"고 평론은 "지껄이면 된다"는 말을 봤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심지어 "평론은 절대 창작 위에 있을 수 없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했다. "아가리 파이터"라는 극단적 표현은 그러려니 했는데 "음악과 책, 영화를 그토록 좋아하면서 그것을 왜 직접 해보진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데까지 이르렀을 땐 그냥 질문 자체가 바보 같아 보였다. 평론가들을 창작자들의 기생충 쯤으로 여기는 그의 주장은 적어도 나에겐 위아래를 따질 수 없는 창작과 비평 사이를 가장 폭력적으로 계급 짓고 곡해한 사례였다.

평론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평론은 창작자들을 자극하고 때론 그들에게 창작을 할 수 있는 힘과 동기를 준다. 음악가들이 스튜디오나 공연장에서 뛸 때 평론가들은 머리와 손가락, 엉덩이로 뛴다. 음악가들에겐 작업실과 콘서트장이 필드겠지만 평론가들에겐 엉덩이 무겁게 몇 시간씩 삐대는 의자가 곧 필드다. 마라톤으로 치면 평론가는 마라토너가 더 뛸 수 있도록 시원한 물 한 병 건네는 사람에 가깝다. 맞다. 평론가는 그런 식으로 "지껄이"는 사람이다. 하지만 평론가도 선택은 한다. 평론가라고 아무에게나, 아무것에나 지껄이진 않는다. 지껄일 만한 것, 지껄여야 할 것, 지껄일 수 있는 것에 관해서만 지껄인다.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평론집 <순응과 전복> 추천사에서 영화감독 이창동은 다음과 같이 썼다.

"김영진이 오랜만에 평론집을 낸다는 소식이 진심으로 반갑고 기쁘다. 나는 그가 '필름 2.0' 같은 매체에 한창 왕성하게 평론을 쓰던 시기가 한국 영화에서 가장 창조적인 에너지가 넘치던 때라고 생각한다. 그 무렵 나 역시 그의 평론에 자극받고, 힘을 얻었다. 그는 한국 영화의 기존 전통과 부딪치며 자기만의 문법을 찾아내려는 동시대 창작자들의 도전에 깊이 공감하고 지지하였고, 그것들의 영화적 의미를 발굴해 부지런히 관객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런 그가 평론가의 목소리를 점차 줄이고 학교와 영화제 일로 물러나 있는 동안 한국 영화는 외적으로 놀라운 성장과 규모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느새 미학적 긴장이 느슨해지고 영화 작업 전반에 자기만족과 나태함이 만연하게 되고 만 것 같다." - 이창동 감독

앞서 내가 쓴 '평론가의 역할'을 이창동 감독도 거의 똑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거기에 보태 "창작자가 만든 작품 속 의미를 발굴해 부지런히 수요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까지 평론가의 역할로 논했다. 미학적 긴장을 유지시키고 창작 전반에 자기만족과 나태함이 만연하는 걸 막아주는 일 역시 이창동이 생각하는 평론(가)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 역할을 해내기 위해 평론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한 마디라도 더 지껄이려는 것이다. "무조건 필드를 직접 뛰는 것, 어쨌든 그냥 하는 것이 최고"라며 "평론 위의 창작"을 주장한 혹자는 차라리 저 역할을 등한시 했거나 저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대중음악 평단을 비판해야 했다.

그래서 갑자기 궁금해졌다. 비평을 깔아뭉개며 그렇게도 강조한 "필드"에서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그 음악은 과연 어떨까. 유감스럽게도 내 지껄임은 근래 들은 괜찮은 헤비메탈 앨범 6장에서 멈춰야 했다.

글/김성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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