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글] 김광석 다시 듣기
[추모글] 김광석 다시 듣기
  • 미디어팜
  • 승인 2019.01.0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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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월6일)은 모던 포크 뮤지션 고 김광석의 23주기 되는 날이다. 아이유가 존경하는 그는 어쿠스틱 기타 연주에 우리말 노래를 어떻게 얹으면 가장 아름답고 절절해지는지를 들려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의 대표작 '다시 부르기'를 본따 김성대 대중음악평론가가 꼽은 그의 대표곡들, 이른바 '김광석 다시 듣기'를 본지에 게재한다. - 편집자주. 

김광석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동물원 1집.

거리에서 (from 『동물원 1집』, 1988, 서울음반) 

'민중'에서 '대중'으로 넘어온 김광석은 이 노래로 스타가 됐다. 이 곡은 김창기의 곡이지만 김광석의 곡이기도 하다. 실제로 곡은 김광석 때문에 유명해졌고(평론가 정도가 아닌 이상)사람들은 지금도 「거리에서」하면 김창기보단 김광석을 떠올린다. 이별의 슬픔,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처럼 노래한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스스로는 언제나 차분해지고 만다. 물론 차분함 끝엔 피 끓는 오열이 기다리고 있기 십상이지만. 그래서 때때로 난 이 곡이 무서울 때가 있다.

동물원 2집.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끊임없이 삽입된 '혜화동'이 있다. 김광석은 이 앨범을 끝으로 동물원을 떠난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from 『동물원 2』, 1988, 서울음반) 

김창기의 곡이 김광석을 만나지 못했거나 김광석이 김창기의 곡을 부르지 못했다면 김광석의 역사, 더 나아가 가요의 역사는 아주 조금 바뀌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두 콤비의 조합은 가요 역사에 남은 노래, 아니 아예 김광석의 역사를 바꾸지 않았나. 이 곡은 쓸쓸한 '거리에서' 돌아온 실연한 이의 텅빈 일상을 읊는 듯 하다. '님'은 '하늘'이 되었고 '사랑'은 '꿈'이 되었다. 반복되는 코러스, 그 사이를 찢을 듯 솟는 김광석의 외침은 오늘도 절절하다. 절절해서 공허하다.

너에게 (from 『김광석 1집』, 1989, 서울음반)

많은 히트곡을 가진 김형석이지만 난 그가 쓴 이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물론 김광석이 불렀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가을 하늘' 같은 그의 목소리가 있어 이 노래는 아름다울 수 있었다. 으레 민중은 단결과 혁명을 원하지만 대중은 시와 사랑을 원한다. 시와 사랑은 김광석의 음악과 목소리의 핵심이다. 사람과 세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김광석의 노래가 있고 소리가 있는 것이다. 시 같은 가사와 사랑스러운 음악의 만남, 그것이 바로 이 노래다.

사랑했지만 (from 『김광석 2집』, 1991, 문화레코드)

"그냥 내가 부를 걸..." 곡의 주인 한동준의 한숨은 대중의 감동이 되었다. 감동은 당연히 김광석 목소리가 내는 특유의 떨림(vibration), 슬픔과 아픔의 중간에 선 그 외침 덕분이었다. 적극적이어도 모자랄 사랑을 수동적으로 하는 것 같다며 이 노래를 탐탁치 않아 했던 김광석이 이 노래를 '더 열심히 더 잘' 부르기로 마음 먹은 것은 한 할머니가 노래를 듣고 열 여섯 소녀의 감정을 되찾게 되었다는 저 유명한 일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일화는 김광석을 좋아하는 모든 이의 것이기도 할 게다.

그날들 (from 『김광석 2집』, 1991, 문화레코드) 

슬픔이란 감정은 잊어야 하는데 잊혀지지 않는 기억 때문에 생길 때가 많다. 「그날들」은 그 순간, 그 감정을 내지르고 있는 곡이다. 김광석은 정말 울고 있는 듯 노래한다. 그 노래까지 한 음 두 음 힘겹게 디뎌 닿는 건반 인트로는 그 자체로 실연의 눈물, 고요한 격정이다. 과대평가 운운하며 김광석의 '창작력'을 어설피 문제 삼는 이들이 잊고 있는 것은 허무하게도 김광석이 '가수(또는 가객)'였다는 사실이다. 김광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목소리에 열광했고 공감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랄까. 김광석은 비록 많은 명곡들을 낳진 않았어도 그 압도적인 목소리로 많은 명곡들을 길러내고 살려낸 것이다. 이 곡 역시 곡을 낳은 김창기가 불렀다면, 글쎄, 곡의 운명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from 『김광석 3집』, 1992, 킹) 

그래도 '창작력' '과대평가' 운운하겠다면 나는 이 곡을 들이대겠다. 그럼 또 '조동익의 편곡 덕분'이라고 하려나. 이른바 '발라드'라는 장르가 국내에서 만개할 즈음, 그리고 서태지라는 괴물이 가요계의 판을 뒤바꾸려 기지개를 켤 즈음에 이 노래가 나왔다는 사실은 그 만큼 이 노래가 묻히기 쉬운 상황이었다는 걸 에둘러 보여준다. 한동헌의 「나의 노래」가 더 유명하지만 난 '김광석 3집'하면 언제나 이 노래다. 거기엔 싱어송라이터 김광석이라는 의미가 녹아있어 더 그렇다. 그는 잘 부르기도 했지만 이처럼 잘 쓸 줄도 알았던 것이다. 그가 괜히 작곡을 따로 공부하고, 그런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노래로 먹고 살겠다" 다짐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잊은 사람들이 자꾸 김광석을 잊으라(?) 한다. 코메디다.

이등병의 편지 (from 『김광석 다시 부르기 1』, 1993, 서울음반)

'남의 노래들로 뜬 가수'라는 감정적인 야유와 '남의 노래들을 살린 가수'라는 감성적인 환호를 동시에 받았던 이 앨범의 이 곡 역시 '청승맞다'와 '미어진다'라는 극단의 감상평을 안고 왔다. "부모님께 큰 절 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같은 정서는 『풀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의 그것보단 윤종빈의 『용서받지 못한 자』나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의 그것에 더 어울린다. 김민우의 「입영 열차 안에서」와 더불어 대한민국 '예비 군인'들의 짧고 깊은 체념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한 김광석만의 감성은 박찬욱의 말마따나 이 시대의 '고전'이랄만 하다. "고전이 달리 고전인가요, 언제 들어도 좋으니까 고전이지."

서른 즈음에 (from 『김광석 4집』, 1994, 킹) 

이 곡 역시 '강승원의 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그저 틀리지 않게 적으면 되는 '팩트'일 뿐이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 '매일 이별하며' 세월을 떠나 보내(야만 하)는 인간의 한계를 나는 이 곡에서 본다. 김광석의 노래에 공감하는 이들은 그들도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 사람이 나누는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데 거의 '올인'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김광석의 노래 또는 목소리를 아꼈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아쉽지만 낭만이 있는, 바로 그 곳에 노래하는 김광석이 있었고그걸 듣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from 『김광석 4집』, 1994, 킹)

3집에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있다면 4집엔 이 곡이 있다. 미풍 맞으며 기차 여행 떠나는 가벼운 마음. 물론 여행은 혼자다. 게다가 무전여행일 가능성이 크다. 돈 없이 혼자 떠나는 여행. 기댈 곳은 사색 밖에 없다. 흔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들 하지 않나. 이 곡의 가사는 그래서 김광석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우리에게 쓰는 편지 같다. 그가 겪어온 일들과 겪고 있는 세상, 꿈과 희망이 뭉뚱그려져 있다. 라틴 느낌의 퍼커션과 밥 딜런(Bob Dylan) 같은 어쿠스틱 기타, 그리고 재지한 트럼펫. '한국사람' 김광석은 저 모든 음악 소스들을 이처럼 여리고 예쁘고 차분하게 품어냈다. 아름다운 일이다.

부치지 않은 편지 (from 『공동경비구역 JSA OST』, 2000, Myungfilm/Jive) 

막내 정우진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머리가 박살난 채 죽었다. 오경필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사건 현장 뒷처리에 분주했고 이수혁과 남성식은 '오욕과 고통의 세월을 넘어 통일의 물꼬를 트러' 넘어온 비극의 경계선을 다시 넘기 위해 무작정 뛰었다. 그러나 무릎에 총상을 입고 쓰러진 이수혁. 소리도 오싹하게 그의 머리 위로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고 '공동경비구역'은 순식간에 '공동전투구역'으로 뒤바뀐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하이라이트다. 여기서 김광석이 부른 「부치지 않은 편지」가 '산을 입에 물고 날 듯' 흐른다. 얼핏 총성과 고함 소리에 파묻히는 듯 싶지만 곡은 마치 '매직아이'처럼 그 총성과 고함 소리를 되묻으며 관객들과 감독의 뇌리를 교란한다. 영화 찍으며 그 곡만 500번 넘게 들었다는 박찬욱의 긴 언급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내가 아는 한 이 곡에 대한 가장 감동적인 멘트다.

"넷이 우정을 나누었던 그 공간이 양측 병사들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나고 있는데요, 말하자면 또 다시 체제에 의한 공격인 셈입니다. 그 때 총성에 의해 압도되어 거의 들리지 않는 김광석의 처절한 목소리는 어느 배우 못지않게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얘기는, 노래가 연기를 하게 하고, 노래가 잘 안 들리게 함으로써 감정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 또 중요한 요소는 엑스트라 병사들의 절규입니다. 그 병사들은 누구입니까, 체제를 대표하는 존재지만 그들 또한 우리의 주인공들과 똑같은 개인이기도 합니다. 우정의 공간을 박살내고 있지만, 그 친구들은 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무슨 원한들이 사무쳐서 저리도 악에 받쳐서 소리지르고 쏘아대나요? 결국 증오보다는 두려움 아닌가요? 나는 관객들이 이렇게 말로 정리해내지는 못해도, 알게 모르게 그 모든 감정을 다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박찬욱 몽타주> 중

김성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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