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권씩] 비실증적 역사서술에 대한 비판, 반일 종족주의
[한 달에 한 권씩] 비실증적 역사서술에 대한 비판, 반일 종족주의
  • 자율바람
  • 승인 2019.08.1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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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회든 나름의 금기어들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적 발언이나 성 소수자 혐오발언이 일종의 금기어로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금기가 많은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금기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기로 가득찬 원시 부족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금기 또는 금기어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대한민국엔 유독 역사적인 금기어들이 많다. 가령 누구라도 5.18광주사태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난 발언을 하게 되면 그 발언에 대한 사회적 혐오감은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언론에선 '막말'이나 '망언'이라는 말로 처리된다. 심지어 학자나 전문가의 발언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 책 <반일종족주의>는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우리 사회 금기어들의 일단을 소개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금기어가 된 기원까지 탐구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한 종래 역사 서술이 얼마나 잘못된 기반 위에 쓰여졌고, 그로 인해 발생한 역사적 금기어들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는 지를 고발하고 있다.

국사 교과서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일제 식민지 시기를 서술하고 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의 40%를 약탈하였고 우리 농민이 토지에서 생산한 쌀도 폭력적으로 수탈했다. 1930년대 말 이후에는 아예 조선 인민을 강제징용, 강제징병, 종군 위안부 등 명목으로 인신을 강제로 동원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경찰과 군은 재판 없이 즉결로 조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갈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했다. 그리해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 인민들이 일제의 수탈과 만행에 고통받던 중 독립운동가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해방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러한 기존 역사서술이 허구와 환상에 기반한 비실증적인 역사서술이라고 비판한다. 그들은 그 허구와 환상의 기원을 ‘반일 종족주의’라는 민족 감정에서 찾는다. 반일 종족주의 아래서 한민족 구성원들은 일본만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은 악이요, 반일은 선이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일제강점기에 대한 종래 역사서술은 일본을 악마화하고 독립운동가를 영웅시 하는 관점을 일관되게 고수해 오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수 십년 동안 기존 역사서술을 비판하는 논문과 저술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선 그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망언이나 막말이라는 언론의 감정적 평가가 학술 논쟁을 방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적 풍조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일제 시대에 대한 반일 종족주의적 인식은 몇 가지 신화적 상징들에 의해 유지·계승되고 있다. 그 상징들의 대표적인 사례가 독도, 친일청산, 소녀상 등이다. 독도는 반일 종족주의 최대의 상징물이다. 반일 종족주의자들은 독도의 국제법적·역사적 복잡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복잡성이 단순화되었다.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임에도 영토 야욕에 눈 먼 일본이 우리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노라는 인식은 반일 감정을 부추기기에 가장 적합한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친일청산 논리도 마찬가지다. 과거 반민특위 활동이 좌절된 이후 이 나라는 친일파 세상이 되어 버렸으며, 이 시대의 당면한 개혁 과제들은 권력을 잡은 친일파 후손들에 의해 언제나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일 종족주의자들은 과거 70년 동안 유보되어온 친일청산을 지금이라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승만 정권 시기에 좌절되었던 반민족행위자 처벌 논리가 친일청산의 논리로 탈바꿈되면서 노무현 정권 당시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사업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반일 종족주의의 상징 중 가장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일 것이다. 이 책에서도 이 문제를 아예 섹션을 달리해 논의를 할 정도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된 논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일본 관헌에 의한 위안부의 강제연행이 있었느냐, 와 위안부 성격이 성노예였느냐, 가 그것이다. 일본 관헌에 의해 위안부가 될 소녀들이 강제로 잡혀갔는지 여부는 이미 학계에서 강제연행이 없었던 걸로 결론이 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시민사회에서는 아직도 이 문제가 논란거리다. 박유하 교수가 집필한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은 이 문제에 대해 학계 연구결과를 반영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재판이 진행 중에 있다. 반면 위안부 성격이 성노예였는지 여부는 학계에서도 논란거리다. 학계 통설은 일본 역사학자인 요시미 요시아키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여 일본군 위안부의 성노예설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대표 저자인 이영훈 교수는 10여 년간 독자적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성노예설을 반박해 왔다. 이 책은 그가 그동안 독자적으로 수집한 자료들에 근거해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일본 군에 의해 합법적으로 관리·감독되었던 직업여성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들이 법인격을 인정받았던 점, 노동조건과 위생관리가 비교적 양호했던 점, 계약 만료시 폐업이 가능했던 점, 소득 수준이 고소득이었던 점 등을 근거로 성노예설을 부정한다. 학계의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역사학의 목적은 역사의 질곡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도 역사를 해방적으로 인식할 때 가능하다. 역사의 질곡은 역사로부터 우리의 한계를 발견할 때 극복 가능한 것이 된다. 일제 식민지 시기를 이해하는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 시기를 통해 반일 감정만을 부추긴다면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우리의 한계를 직시할 줄 알아야 한다. 역사학도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어야 한다. 잘못된 역사학은 잘못된 역사의 반복을 부추길 뿐이다. 반일 종족주의적 역사학은 역사 속에 존재한 우리의 한계, 실수, 오류에 대한 책임을 애써 회피해 왔다. 결국 역사의 모든 책임은 일제의 악행 탓이어야 했다. 거기에는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해방적 메세지가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반일 종족주의적 역사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사학의 좋은 이정표가 될 것이다.

글/자율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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