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섬진강을 담다! '지리산 도사' 김종관 사진가
지리산과 섬진강을 담다! '지리산 도사' 김종관 사진가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5.02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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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출신...'똑딱이카메라'로 시작해 40년간 사진 찍어
"일몰은 죽은 빛, 희망 주는 지리산 여명만 담는다"
담을 수 없는 사진은 포기...찍은 사진은 최소 3개월뒤 확인
고 노무현 전대통령과 '형, 동생' 섬진강에서 막걸리잔 기울여
지리산과 섬진강만 카메라에 담는 '지리산 도사' 김종관 사진가. 그는 틈틈이 지리산을 배경으로 독사진을 찍기도 한다.

"나는 사진작가가 아니다. 지리산 도사, 농부 사진가일 뿐이다."

1962년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용강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지리산 도사' 김종관 씨는 올해로 40년째 사진을 찍고 있는 사진작가 아니, 농부 사진가다. '똑딱이 카메라'부터 시작한 사진 인생. 그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작품으로 남겨야겠다 생각한 건 사진 인생의 절반이 지난 20년 전부터다. 그런 그가 평생을 걸고 천착한 피사체는 바로 지리산의 여명이다. 지리산은 세계 3대 명산 중 하나다. 김 작가는 정도와 원칙, 진리를 가르쳐주는 지리산을 '가짜 세상'과 구분 짓는다. 48개국 이 산 저 산을 다녀본 그에게 지리산은 히말라야나 알프스보다 더 높고 위대한 산이다. 세상에 지리산만큼 아기자기한 산이 없고 지리산만큼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 보여주는 산도 없다.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을 괜히 '금수강산'이라 부르는 게 아니다. 그 금수강산의 정점을 지리산이라 보는 김 작가는 내 산이 얼마나 좋은 지도 모르고 해외 나가 기차에서 눈 한 번 보고 왔다며 좋아하는 일부 한국인들이 그리 탐탁지 않다. 우리 것도 모른 채 남의 것을 과찬하는 모양새가 불편한 것일 터. 녹차 농사를 짓는 농부이자 지리산 마고할미와 밀애를 나누는 대자연의 사진가 김종관 씨를 경남 하동에서 만나고 왔다.

미디어팜과 인터뷰 중인 '지리산 도사'.

‘사진’과 ‘작품’ 구별해야

아직 세상이 잠에서 덜 깬 새벽 2~3시. 15kg 카메라 장비를 짊어진 김종관 씨가 농부의 탈을 벗고 지리산을 오르는 시간이다. 그는 멀리 오를 땐 자정에 나가고, 비교적 가까운 곳은 새벽 3시에 걸음을 뗀다. 그는 산꾼이다. 전 세계는 물론 대한민국 산들도 그의 발 아래 웬만하면 다 밟혔다. '산에 가면 좋은 걸 많이 본다'는 그는 문득 자신의 고향을 둘러싼 지리산을 작품으로 남겨놔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나 혼자 보고 와서 좋았다 해봤자 사람들은 잘 모른다. 가슴 두근거렸던 그 거대한 자연의 몸부림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느끼고 싶어 김 작가는 지리산 구석구석에 렌즈를 들이밀었다. 그렇게 지리산만 380만 컷 이상을 찍었다. 4년 안에 그는 500만 컷 달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

“사람들은 사진과 작품을 잘 구분하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작품이란, 느낌을 주고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부분들을 찍은 것입니다. 누구나 찍을 수 있는 건 사진이고, 희귀성에 기반해 감동을 주는 것이 작품인 것이죠. 사실 제가 SNS에 올리는 건 C급 작품들이에요. 150 여장 되는 A급 작품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제가 찍은 380만 컷들 중 B급은 3000장, C급과 D급이 1만장 정도 됩니다. 이 정도를 대한민국에서 찍을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356일 중에 300일 이상은 산을 타야 하거든요.(웃음)”

피는 못 속인다 했던가. 알고 보니 그의 아들도 사진에 관심이 있었다. 아니, 많았다. 어느 정도냐면 김 작가의 아들은 이미 중학교 때 세계 사진대회에서 2차례 최우수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아들은 이른바 ‘감성 사진’을 주로 찍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지리산 사진은 바로 그 아들이 이어갈 것이다. 김 작가는 자신이 끝을 볼 500만 컷 지리산 풍경 파일들을 아들에게 물려줄 일을 생각하고 있다. 또 이 사진들이 어떻게 나왔는지 글로써 기록하고 때가 되면 전시도 할 예정이다.

김종관 사진가가 바라본 지리산의 봄과 여름. 그가 SNS에 올리는 이런 사진들은 대부분 C급 작품들이라고 했다. 과연,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는다는 A급 작품들은 어떤 모습일까.

“제대로 담을 수 없다면 포기 한다”

김종관 작가는 사진을 배운 적이 없다. 그렇다고 꼼수로 대충 배운 것도 아니다. 그는 직접 찍으면서 스스로 사진을 터득했다. 몸으로 부대끼고 실천하고 배우며 느낀 사진이 바로 김종관의 사진이다. 그는 사진을 손대지 않는다. 사진가 김종관은 원본주의자다. 그는 언제나 단 한 컷으로 승부한다.

“전 프레임이 다 담을 수 없을 땐 그냥 포기합니다. 부러 자르고 붙이고 꾸미지 않죠. 굳이 예쁘게 찍으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전 느낌과 감동을 주는 사진을 추구합니다. 불가능을 찍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사진작가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 사진으로 먹고 살고 싶진 않아요. 그저 지리산의 역사를 남기고 싶을 뿐이죠. 수 백 년, 수 천 년이 지나도 담을 수 없는 사진을 남기는 것, 그것이 제가 사진을 찍는 이유요 자처한 책무입니다.”

지리산을 담기 위해 새벽 산길을 다니니 김 작가의 일상은 언제나 한파와 험로의 일상이다. 30미터 거리에서 곰과 맞서도 봤고, 키 넘어 내린 눈에 파묻혀 2시간을 헤매 천왕봉에 오르지 못한 적도 있다. 그래도, 그럼에도 김 작가는 계속 지리산만 찍을 거라 말한다. 그것도 지리산 여명만을 편애하겠노라고 그는 다짐 또 다짐한다.

“전 일몰은 찍지 않습니다. 일몰은 죽은 빛이죠.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명만 찍는 겁니다. 어둡고 힘든 사람들에게 빛으로써 희망을 주기 위해서죠. 그래서 제 호도 ‘여명’입니다. 전 앞으로도 지리산만 찍을 생각이지만 훗날 산에 못 갈 때가 되면 다른 곳을 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역 ‘포인트’들을 찾아 다녀볼까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동군이 도용했다는 의혹을 받은 바로 그 사진. 김 작가는 이 사진에 '황금이 흐르는 왕의 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동군과 갈등 "사과만 했더라면..."

김 작가는 최근 사진 저작권 문제로 하동군을 고소했다. 하동군이 녹차 홍보 관련 책자에 김 작가의 작품으로 보이는 사진을 도용한 것이 고소 이유였다. 작가 스스로 ‘황금이 흐르는 왕의 강’이라 이름 붙인 해당 사진은 하필이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마고할미의 도움을 받아 지리산과 섬진강의 절경을 담은 그곳을 김 작가는 ‘세계 3대 포인트’라고 했다. 카메라를 든 누군가에겐 어쩌면 소원일 수도 있는 포인트 중의 포인트였다. 그런 귀한 곳에서 찍은 사진을 하동군이 도용한 것이다. 인터뷰를 했던 지난 4월 19일. 김 작가는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갔다.

“처음엔 사과했던 군이 말을 바꿨습니다. 오늘 경찰 조사를 받을 건데요. 따지고 보면 고소까지 갈 사건도 아니었죠. 관에서 내 사진을 도용해 어디 내다 판 것도 아니고, 좋은 일 하려고 한 장 빼 간 건데. 그러면 그냥 ‘한 장 쓰려고 했는데 잘못 된 것 같습니다’ 사과만 했어도 끝났을 일이예요. 그런데 원본을 보여 달라니까 핑계만 대고 있고 사과도 없고, 나 몰라라 하는 게 괘씸한 겁니다. 남이 평생 한 장 찍을까 말까 한 사진을 도용해놓고 말이죠. 간단하게 끝날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행정이 예술인들을 보호해주진 못할망정 되레 작품을 몰래 빼가고. 제 입장에선 부당하다고 본 겁니다. 저는 늘 원칙을 지키고 정도와 정의를 위해 살아온 사람입니다. 지리산에 4천 번 이상을 오르며 느낀 대로, 깨달은 대로 사는 거죠. 분명히 말하지만 제가 찍는 사진들은 제 이익, 제 목적을 위한 게 아닙니다. 지리산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것입니다. 전 지금이라도 군에서 사과를 하면 고소를 취하할 생각이에요. 선한 마음으로 사는 게 가장 좋은 것임을 알기 때문이죠. 악을 악으로 갚으면 결국엔 악 밖에 남는 게 없습니다.”

김 작가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선 욕심을 버리라고 말한다. 마고할미가 아무리 좋은 모습을 보여줘도 남겨두고 와야 한다고, 그래야 다음 것을 보여준다고 그는 얘기했다. 그래서인지 김 작가는 찍어온 사진들도 잠시 버려둔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3개월 뒤에 열어본다. 진짜 좋은 건 1년 동안 안 보고 던져둔 것도 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때 봤던 눈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내 사진이 보인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 눈에 그 풍경이 살아있으면 진짜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지리산은, 버려야 비로소 보이는 산이었다.

“지리산엔 한민족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기도 하죠. 내가 가진 문제, 내가 처한 어떤 어려움도 지리산은 다 받아줍니다. 피할 곳이 없을 때 품어주는 산이 바로 지리산이에요. 산 중엔 명산은 될 수 있고 영산은 될 수 없는 산이 있는데, 지리산은 둘 다 가능합니다. 조식, 최치원 같은 학자들이 왜 지리산을 찾았겠습니까. 지리산엔 올랐던 사람을 다시 부르는 기운이 있습니다. 죽을 고생을 하고서도 다시 가는 산. 가면 갈수록 깊이를 아는 산. 갈 때마다 다른 산. 설악산은 처음 갔을 때가 좋지만 지리산은 한 번 가서는 모릅니다. 가면 갈수록, 갈 때마다 더 좋아지는 산이죠. 그게 지리산의 매력입니다.”

도사가 만난 하동·지리산의 가을과 겨울.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섬진강에서 기울인 막걸리 잔

섬진강은 김종관 사진가에게 일생의 작품을 선물한 곳이기도 했지만 평생 잊지 못할 벗을 선물해준 강이기도 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그는 인권 변호사 시절 자신이 너무나 좋아한 섬진강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김 작가는 그런 고인과 형, 동생 하며 자주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고인을 마지막으로 본 건 대통령 후보 시절 부산 코모도 호텔에서였다.

"토요일 저녁에 와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그때만 해도 5천원이면 막걸리를 코가 삐뚤어지게 마실 수 있었으니까.(웃음) 촌에서 태어나 촌에서 자랐고, 또 넉넉지 않은 집에서 커서인지 그는 정말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고인께선 꼭 섬진강 참게장으로 밥을 드셨었죠. 돌아가신 뒤, 악양 평사리 뜰에 플래카드 하나 달고 저 혼자 분향소를 만들고 지켰습니다. 모두 나를 미쳤다고 했죠. 관에서도 하지 않는 일을 했으니까. 3천 명 이상 사람들이 찾아왔고, 3천 만원 이상 기부금도 들어왔습니다. 중간에 고인과 정치 성향이 다른 모 청년회에서 플래카드를 뜯어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다시 세우고 했죠. 그가 그립습니다."

글·인터뷰/김성대 기자 사진제공/김종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