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예유근의 기억의 더께] 나는 어쩌다 화가가 되었을까?
[서양화가 예유근의 기억의 더께] 나는 어쩌다 화가가 되었을까?
  • 예유근
  • 승인 2020.02.1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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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살아가면서 기억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없는 육체처럼 허무하고 공허하다. 그리고 이처럼 소중한 나의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현재 나의 삶이 죽음과 같다. 소중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미래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런 생각의 확신으로 ‘나는 어쩌다 화가가 되었을까?’ 하는 나만의 '기억의 더께'를 찾아가서 글로 써보는 것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또 색다른 작업을 할 때 마다 느껴지는 기억의 더께 모두가 현재 나의 시간 속에서 생각의 꼭지와, 영감 등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시간 속에 존재하면서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든,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오든 나만의 과거 시간인 '기억의 더께'는 언제나 현재의 나와 함께하는 소중한 현실인 것이다.

"나는 어머님 등에 업혀 노래를 듣는 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밤하늘에 떠 있는 유난히 큰 달을 보면서 왜 저 달은 계속 나를 따라오는 지 참 궁금했다." 사진=예유근 제공.

기억의 더께 하나

아버님은 내가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님께선 나를 혼자 집에서 낳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이가 온몸이 원숭이처럼 털복숭이였다.(아마도 미숙아였던 듯 하다.) 게다가 나는 울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방 윗목에 나를 대충 던져놓고는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은 처지가 너무 서럽고 화가 나 혼자 바닷가로 나가 울면서 헤매고 다니셨다. 바로 옆집에 사셨던 이모님께서 그런 어머니를 겨우 찾아 달래 데리고 오셨다. 이모님과 함께 집에 와 보니 겨우 삐삐거리며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살았는가 보다 하고 함께 챙기셨다 했다.

그런 내 이름이 유근이인 것은 유복자를 의미하는 남을 유(遺)자를 붙여서다. 이름의 끝 글자는 뿌리 근(根), 즉 남긴 뿌리인 것이다. 호로 자식이라는 의미가 그러해도 나는 나의 이름에 늘 긍지를 가졌다. 뿌리를 남긴다는 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될 뿐 아니라 모든 일에는 근본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아주 성실하고 신용 있는 신실하신 분이셨다. 친일은 안 하셨지만 신용이 좋아, 특히 일본사람들을 상대로 많이 거래를 하며 장사를 잘 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많은 돈과 집들을 남겨 주셔서 우리 집엔 늘 일가친척들이 붐볐다. 어머니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돈 걱정은 안 해도 되리라 생각하셨다. 그래도 홀로 4남 1녀 자식들 교육을 위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운영하던 충무동 공설시장(자갈치시장의 모태)의 부산, 경남 총판 철물 및 그릇가게를 이어 받아 여자 몸으로 직접 운영하셨다. 홀몸이 되어 힘든 와중에도 항상 일찍 가게로 나가 장사를 하고 늦게 영도 집에 오셨다.

미취학 아동기 시절 말띠인 나는 고삐 풀린 동네 망아지 마냥, 특히 당시 말을 많이 키우던 영도와 영도다리 옆 자갈치 시장 어물전을 비롯해 남포동, 광복동, 용두산 공원 등을 뛰어 다녔다. 후에 성인이 되어 나는 농으로 "나는 말띠라 어린 시절에 말처럼 온 동네를 놀러 다니면서 호연지기를 그때 다 깨치지 않았나 싶다"고 자주 말했다.

장사 하시느라 일찍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나를 돌볼 틈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고심 끝에 나를 주로 극장에 맡겨 놓으셨다. 오래 전 다 없어졌지만 충무동의 '보림극장'이란 곳이다. 어머님이 잘 아시는 동네 아저씨 한 분이 극장 기도를 보고 있어 나를 믿고 맡겼는데, 그 분은 거의 매일 나를 잘 챙겨 주셨다. 보림극장에선 주로 외화 중 서부영화를 많이 상영했는데, 가끔은 무성영화를 연사가 구성지게 설명을 잘 해주기도 했다. 앨런 래드가 주인공인 영화 <셰인>이나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수 많은 서부 영웅들. 세 번 정도 반복해서 보고 나면 나도 모르게 영화의 장면 장면이 다 외워져 총 쏘는 주인공 흉내를 내곤 했다. 어머니가 날 데리러 오실 때면 자랑삼아 신나게 영화의 스토리를 이야기 해드렸다. 함께 집으로 돌아갈 때면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말씀하시길, "니 아버지는 미국에 돈 벌러 가셨는데, 지금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셨단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니가 좋아하는 쌍권총이랑 책 등 선물을 한 보따리 가지고 오실 거야"라고 했다.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줄도 몰랐던 나는 그런 어머님 말씀만 믿고 많은 선물을 들고 곧 오실 아버님을 기다리며 행복해 했다.

앨런 래드가 주인공을 맡은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1953년작 <셰인>. "영화를 세 번 정도 반복해서 보고 나면 나도 모르게 영화의 장면 장면이 다 외워져 총 쏘는 주인공 흉내를 내곤 했다."

어머니는 혼자 장사를 하시느라 너무 바쁘셨다. 대신 누님이 자연스럽게 엄마 역할을 대신하셨다. 늦둥이 막내인 나는 나이 차가 많은 형님 세 분과 늘 같이 놀거나 잠을 자곤 했다. 눈을 뜨면 누님과 큰 형님은 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누구나 그렇겠지만, 연필로 공책에 만화를 많이 그리고 있었다. 특히 큰형님(예일랑-일본식이름)은 악당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주인공이 권총을 뽑기 전 비장한 모습을 많이 그렸다. 그리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인디언과 싸우는 서부시대 전투 장면을 많이 그렸는데, 너무나 현실감이 있었던 큰형님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한 나는 그것을 많이 베껴보곤 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감독교사에게 들은 비밀 후문인데) 큰형님은 중학교 입시 시험장에 가서까지도 문제지 뒷면에 소싸움을 하는 성난 황소 얼굴을 크게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당시 누님은 고졸로 공부를 더 해서 교사자격증을 받고 발령대기 상태였다. 막내인 나를 돌보는 일은 주로 누님의 몫이었는데, 당시 누구나 그러했듯 탱크나 총, 소꿉 등 장난감을 흙으로 만들어 함께 가지고 놀았다. 그런 두 분의 그림을 좋아했던 영향 때문인지 나는 매일 본 영화들의 영상을 떠올려 큰형님 흉내를 내며 운명처럼 그림을 많이 따라 그렸다.

사라호 태풍 때 부산남중학교로 피난 가 깨가 많이 붙은 맛있는 주먹밥을 받아 먹던 기억은 생생하다. 어머니가 태풍이 지나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자며 밤에 나를 등에 업고 가면서 노래를 불러주셨다. 나는 어머님 등에 업혀 노래를 듣는 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밤하늘에 떠 있는 유난히 큰 달을 보면서 왜 저 달은 계속 나를 따라오는 지 참 궁금했다.

도착한 우리 집엔 부근 간즈메(통조림) 공장에서 떠내려 온 간즈메들로 가득 했다. 아쉬웠던 건 집이 물에 잠겨 그 시절 사진들이 많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글/서양화가 예유근

1954년생 

전시

-개인전 9회(서울, 부산)

-단체전 및 국제전

1981 부산미술대전 대상(부산시장상) / 2019 아시아호텔 아트페어(파라다이스호텔/부산) 외 약 470여회 국내외전 출품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부산시립미술관, 그랜드호텔, 동방호텔, 지오 플레이스, 온종합병원 외 다수

학력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졸 /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졸

경력

부산미술협회부 이사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부산미술대전 심사위원, 부산현대작가회 회장, 브니엘예고 예술교감,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외 6개 대학 강사 역임 등

현) 부산미술인촌 추진위원장, 부산비엔나레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