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예유근의 기억의 더께] '파란만장' 중학교 시절
[서양화가 예유근의 기억의 더께] '파란만장' 중학교 시절
  • 예유근
  • 승인 2020.04.0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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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철근 셋째 형님의 고등학교 졸업 기념 사진.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사진=예유근 제공.

기억의 더께 셋

일차 시험(경남중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이차(남중학교)로 갔다. 어머님께서 "자식을 다섯이나 키우면서 일차 학교에 한 명도 못 보내 봤다"고 신세 한탄하시는 모습을 보고 내심 충격을 받았다. 당시 입시제도는 일차는 일류였고, 출세의 지름길이 학력이었다. 지금은 몽매 학벌주의를 아주 싫어하지만 나 역시 어머님의 교육열에는 저항할 수 없었다. 결국 중학교 일차의 실패 요인은 그림에 빠져 학업을 등한시 한 것이라 생각하고 나중 고등학교는 공부를 열심히 해 반드시 일차를 진학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은 멈출 수가 없었다. 입학 하자마자 마침 선배들이 미술부원 모집 홍보하러 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 미술부에 가입을 해버렸다. 그리고 미술부 선배들 따라 소묘, 수채화, 구성 등 참가 종목으로 전국 미술 실기 대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수상을 했다. 그럴수록 특히 수학, 과학이 어려워지고 점점 관심이 없어지면서 일반 교과 성적은 갈 수록 떨어졌다.

미술 선생님은 박영호, 민병표 선생님이셨는데 박 선생님께선 작업은 잘 안하셨고 민 선생님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잘 생기고, 키도 크고, 아주 멋이 있으셨다. 그는 미술실에서 캔버스를 대형 이젤에 세워 나이프를 사용해 유화를 하셨는데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나는 당신의 그 모습에 반해 유화를 많이 따라 그렸다. 미술실과 복도에는 항상 많은 수작들로 생각되는 박춘재 선생님 작품과 선배작품들이 붙어 있었는데 지금도 다시 보고 싶은 그림들이다.

나는 교내 저축 장려 포스터 공모전에 저금통으로 들어가는 지폐를 아주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을 출품해 대상을 받았다. 계단 통로 게시판에 전시 중이었는데 누가 칼로 돈만 오려가 버렸다. 제법 오랫동안 그 작품이 계속 전시돼 있어서 새로 그려 붙여 놓기도 했다.

그 시절엔 당연한 전통인 것처럼 옥상과 그 옆 미술실은 학원 폭력의 은밀한 본부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규율부 선배들이 후배들 군기 잡는 곳이기도 했고, 주먹들의 한 판 결투 장소이기도 했다. 미술 선생님을 대신해 선배들이 그림 과제를 내고 못 해내면 엎드려 뻗쳐 해 엉덩이나 허벅지를 몽둥이로 구타했다. 어찌나 여러 핑계를 대면서 패던지 입학 한 미술부 신입생이 30여 명에서 2학년 진학 할 땐 동기 다섯 명이 겨우 남았다. (이때 미술을 포기한 강병기란 친구는 후에 한의사가 되었지만 가끔 이 시절을 추억하며 그때 그림을 포기하게 된 것을 많이 아쉬워했다.)

나는 어리석게도 허벅지에 피멍이 들도록 맞아가면서 3학년 진급 때는 한용식과 둘이 겨우 남았다. 특히 한용식은 솜씨가 다재다능한 천재적 솜씨를 가진 친구였는데 나중에 둘이서 특기생으로 동래고로 같이 진학해 고교 미술부 시절도 함께 했다. 용식이도 3학년이 되자 후배 이갑재(소설가, 시인), 한춘근(서양화), 강광수(목사), 김신행(디자이너) 등 후배를 많이 때렸고 난 늘 말리며 그렇게 서로 어울려 정들었다. 그리고 학교대표로 실기 대회 상을 받아와야 한다는 허황된 명분의 사명감으로 전국 미술 실기 대회를 의무 반, 자의 반으로 즐겁게 다녔다. 특히 해마다 여학교 미술부생들과 함께 기차 타고 서울이나 진주 등 타지로 가 같은 여관 숙소에 머물며 대회 전날 밤에 함께 어울려 노는 재미는 선배로부터 배운 미술 활동 외의 즐거움이었다.

미술 실기 대회 참가는 부산의 타 학교 그림 그리는 친구들을 사귀는 재미와 함께 부상품 받는 즐거움도 쏠쏠했다. 특히 중학교 3학년 때는 홍익대학교 미술 실기 대회에서 중·고등학교 전체 대상인 '홍익대학상'을 받고 <국제신문>에 수상 기사가 나기도 했다.

각 학교 인솔 교사 선생님들도 대회 때마다 자신의 미술부 제자들이 좀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정성으로 지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린 제자들에게 작가의 자긍심을 실어주기 위해 열악한 미술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대단하게 직접 교육과 그림으로 실천하셨던 그 분들의 작업이 오늘날 한국 미술의 역사가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집에서 걸어 다니기 편한 미술학원을 다녔다. 그 곳은 부산의 관인 미술학원으로는 1호였던 부산종합예술학원(원장-김강석 미술평론가)이었다. 장소는 옛날 미화당백화점 5층 무용학원 안쪽이었는데, 용두산 공원과 연결된 다리 바로 밑이었다. 선생님께선 실기 지도는 직접 안 해주시면서 주로 이론과 책만 많이 보여 주셨다. 실기 지도는 주로 박생광, 하인두, 김구림, 김영교, 차종례, 차동수 등 여러 분들이 틈틈이 해주셨다. 학원 벽에는 이 분들의 작품이 많이 걸려 있었지만, 기라성 같은 그 분들의 명망을 당시 내가 알 리 없었다. 그 분들은 내가 배우고 싶은 그림은 잘 가르쳐 주시지 않았을뿐더러 그 분들의 그림 자체가 그땐 그냥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특히 어린 내가 보기에 하인두, 김구림 선생님의 그림 같지 않은 작품은 많은 의문을 던져주었는데,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가 추상미술에 이끌리는 전초였다.

나는 몰래 정물대 뒤에 쌓여 있던 하인두 선생님의 작품 위에 내 정물화를 그리기도 했다. 한 번은 김강석 선생님과 몇 분 선생님께서 수채화로 그린 내 정물화를 보시곤 극찬을 해주시고 액자에 넣어 정물대 위 벽에 걸어 주셨다.(보고 싶은 내 작품ㅜㅜ) 더구나 고등학교 누나들이 전시 축하 한다고 창선 파출소 앞 '뉴욕제과점'의 맛있는 빵과 우유도 사주었다. 그렇지만 가끔 이유도 모른 채 일부 선배들에게 밖으로 불려나가 발로 정강이뼈를 까이곤 했다. 고등학교 선배들의 불량스러운 모습에 시달리기도 싫은데다 집안 형편도 날로 어려워져 밀린 회비도 납부하지 못해 부끄럽고 미안해 학원 다니기를 그만 두어 버렸다. 그러나 그림을 더 배우고 싶은 마음에 친구가 다니는 여러 화실은 기웃거렸다.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미술을 포기하고 공부나 열심히 해서 당시 존경하던 ‘영도구 국회의원 예춘호’ 아재처럼 법대를 가 후에 정치를 할까 생각했다. 마침 집에서도 그림 그리는 데 반대가 심했던 터였다.

미술실에 가지 않으니 허벅지에 피멍 들지 않는 건 너무 좋았다. 선배들이 수업 중에도 잡으러 와 설득했다. 어느 날 민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부르셔서 "그림을 계속 하고 싶냐" 물으시곤 나의 정말 하고 싶은 의지를 확인한 뒤 선배들이 다니는 화실로 가라고 소개해 주셨다. 배려해 주신대로 한 학년 위 미술부 선배인 김덕길(서양화가), 안석준(한국화가) 형이 다니던 화실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고)박춘재 선생님이 운영하던 대청동 인쇄 골목길 '퓨르 화실'이었다.

시간이 지나 1900년대 어느 날 민 선생님의 은덕을 잊을 수 없어 하던 중, 양산 어느 술집에서 중학교 시절 민 선생님과 똑같이 생긴 민 선생이 "아버님에게서 예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너무나, 정말 똑같이 닮아 선생님께서 다시 살아온 것 같은 상황에 놀랐다. 자세히 보니 당신의 아들인 민중기 선생인데, 더 놀라운 건 과목도 미술이었다. 참, 인연이란 대를 물리기도 함에 경이로워 아들에게나마 감사함을 표했다.

박춘재 선생님께 수채화나 정밀묘사 실기를 엄청나게 배웠다. 그 분의 당시 마티스 풍 꿈틀거리는 풍경과 정물의 작업 세계는 어린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며, 고호 등 미술 역사를 조금 알게 해주는 과정이었다. 특히 선생님께서 광고 회사에 청탁 받은 신문 광고의 제품 정밀묘사 작업은 어린 나에겐 너무나 놀라운 것들이었다. 선생님은 작업에 대한 열정이 넘쳐나 당신 작품에 그걸 미처 다 담지 못하셨다. 나중에 한글 폰트를 새롭게 개발한 부산고 다니던 황부용(디자이너, 서양화가) 형님께서 선생님의 솜씨를 빼어나게 닮게 잘 그렸던 기억이 새롭다. 어느날 박춘재 선생님께서 화실 운영이 어려운 데다 <부산일보>사 도안 기자 일에 전념하신다고 화실을 접게 됐다.

다니던 화실이 갑자기 없어져 버려 다른 화실로 구경만 다니며 방황하던 중, 뜻밖에 집으로 배달된 한 통의 편지. 아~아! 김강선 석생님께서 운명처럼 나에게 보낸 깐깐한 자필 편지 한 통! 어린 나의 재능을 평소 좋게 보았으니 다시 와서 그림 공부를 하였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글/서양화가 예유근

1954년생 

전시

-개인전 9회(서울, 부산)

-단체전 및 국제전

1981 부산미술대전 대상(부산시장상) / 2019 아시아호텔 아트페어(파라다이스호텔/부산) 외 약 470여회 국내외전 출품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부산시립미술관, 그랜드호텔, 동방호텔, 지오 플레이스, 온종합병원 외 다수

학력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졸 /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졸

경력

부산미술협회부 이사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부산미술대전 심사위원, 부산현대작가회 회장, 브니엘예고 예술교감,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외 6개 대학 강사 역임 등

현) 부산미술인촌 추진위원장, 부산비엔나레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