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야기] 호치민 임지로 가다
[베트남이야기] 호치민 임지로 가다
  • 미디어팜
  • 승인 2019.01.02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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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화일권 씨는 고등학교 영어교사로서 진양고, 대곡고를 거쳐 지난해 합천고를 끝으로 명예퇴직 했다. 퇴직 후 곧바로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신청, 현재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화일권 제공.  

 

2018년 11월 7일, 인천공항을 떠나 하노이로 날아왔다. 이제껏 나다니던 외유성(?) 해외여행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 베트남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자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네 번째 오는 베트남은 이제 낯설지가 않다. 그리고 나의 2년간 삶의 흔적을 글로써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다.

조지 오웰은 글을 쓰는 이유가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오웰은 '팩트(fact)'라고 했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나는 그 어느 편도 아니기에 긴 글을 써 간다는 것이 사실은 두렵다.

다만, 나도 아름답게 쓰기보다는 오웰처럼 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하려 한다. 그는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고자 한 작가였지만 나에겐 그런 의도도 없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다. 단지 내가 보고 느낀 것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기술해 보고자 한다.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글 쓰는 일이 쉽지만은 않기에 쉬 장담은 할 순 없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써 보려고 한다. 하긴 정치적 목적이 없는 글은 생명력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고 화려한 수식어가 난무하는 그런 글은 쓰지 않을 것이다. 현장감을 더하기 위해 되도록 현재형으로 쓸 것이다. 단, 역사적 사실은 항상 과거를 쓰게 되어 있다.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이라는 소설이 있다. 꼭 20년 전에 드라마로 방영하였는데 가끔 본 적이 있다. 돈도 안 되는 바둑과 당구와 카드에 한창 빠져있던 시기라 자주 보진 못했던 것 같다. ‘쏭바강’이란 게 어디에 있을까, 여기에 와서 찾아보려 해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쏭(sông)’은 한글로 ‘강’이고 ‘바(ba)’는 아버지다. ‘아버지의 강’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러면 ‘쏭바’라고 해야 할 텐데 작가가 그것도 모르고 ‘쏭바강’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리가 없지 않은가. 벌써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작가한테 물을 수가 없다.

소설 1부는 전쟁 중 한국 군인들의 생활과 한 병사의 실패한 연애담이고, 2부에서는 전쟁 말기 월맹이 사이공을 침공해 성공하는 긴박한 장면들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77년도엔 베트남전쟁을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얀전쟁>은 작가 안정효의 장편소설이다. 월남전 참전 이후 몸만 살아와서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한기주란 인물을 중심으로, 이 시대가 역사에 진 부채를 솔직하게 제시하고자 했다. 종군기자였던 작가의 기억을 되살린, 사실성이 살아있는 작품이었다. 또한 월남전을 다른 각도에서 우리 국민에게 알려준 첫 작품이 아니었을지.

황석영은 <무기의 그늘>을 썼다. 역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황석영이 베트남전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책이다. 이미 봐왔던 베트남전쟁에 관한 영화나 책보다 긴박한 호흡은 덜하지만, 그 압박감이나 무게감에서는 훨씬 앞서는 내용을 선사한다. 그는 미국의 자본주의를 상징적으로 내세우는 현실감을 가미하여 객관적이고 독자 위주의 감상을 제공했다.

 

"2018년 11월 7일, 나는 베트남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자 하노이로 왔다." 사진=화일권 제공.

 

난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였기에 그런 상황을 잘 안다. 그것도 정문을 지키는 UP와 양공주 촌을 순찰하는 CP를 하였기에, 더욱 절실하게 알 수 있다. <겨울 나그네>의 무대인 캠프 하비(Hobby)에서 근무를 하지 않았던가! 나의 턱걸이(턱거리? 고개가 높아 숨이 턱에까지 차오른다는 뜻을 가진 고개다)와 영화 속 ‘턱걸이’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두천 하면 그 양공주 촌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스펙터클한 장면은 없어도 어느 소설보다 박진감이 넘치고 흥미진진했던 것 같다. ‘황석영’에 대해 한때 실망했던 적은 있었지만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읽었을 때의 충격과 감동이 아직도 남아있다. 정리 대상 품목에 들지 않는다.

방현석은 <존재의 형식>과 <랍스터를 먹는 시간>을 통해 베트남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박정희 군대와 노무현 군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는 방현석이 좋다. 그래서 베트남으로 오면서 아직 읽지 못한 <하노이에 별이 뜨다>를 가져 왔다. 이 책 <하노이에 별이 뜨다>엔 '소설가 방현석과 함께 떠나는 베트남 여행'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긴 하지만 그 흔한 풍경, 관광지 위주의 여행안내서는 아니다. 다만 작가가 권하는 여행은 베트남의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전쟁의 흔적들을 함께 가는 여행서이자 베트남 사람들의 상처에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여행서이며, 또 한국과 베트남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여행서다. 그리고 ‘호치민 아저씨’의 흔적을 찾아가는 책이다. 방현석의 말처럼 20세기가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고 한다면 베트남은 가장 치열하게 20세기를 살아온 나라다. 그 중심에 ‘호치민’이 있고 나는 그 ‘호치민의 루트’를 따라 여행을 할 작정이다.

“할 수 있다면, 광주 망월동의 시인 김남주 묘역을 참배하고 싶다”고 했다는 반 레 시인은 만날 수 있을까? 1980년대 초반 베트남 라디오에서 김남주의 시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감옥에서 시를 썼다는 ‘한국의 전사 시인’을 생각하며 호치민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가 떠올린 호치민은 박헌영과 구 소련에서 같이 공산주의를 공부했었다. 박헌영은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하고 호치민은 정약용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헤어져 그의 나이 51세에 베트남으로 돌아오게 된다.

 

산다는 건 길을 가는 것이다

나는 50살에 인도로 떠났다.

인도에서는 쉰 살을 '바나프라스타'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산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라고 한다. 스스로 산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라는 것이다. 자기 몫의 삶을 위해 마음을 닦으라는 가르침이다. 그렇다고 스님들처럼 산에 들어가 생활하라는 말은 아니고 무뇌아나 욕심쟁이처럼 살지 말고 자신도 돌아보고 자기 주위에 있는 대상들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동안 이기적으로 살았으니 나 아닌 다른 사람, 우리 가족 아닌 다른 가족이나 사회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행복한 부자들을 꿈꾸는 가족들은 그런 분들 안 계시겠지만 얼마나 자기를 위해 이기적으로 살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없이 살았는지 반성해봐야 한다는 말이고 높은 산에 올라 넓게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일 것이다.

9년 전 나는 감히 마음을 닦기 위해 인도로 간 것인지 모른다. 50세에 무슨 일탈을 도모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인도의 철학과 정신, 그리고 인도의 역사는 어디에 있는지 결국 찾지 못하고 과거라는 험악한 굴레에서 헤매다가 돌아오고 말았다.

나는 이제 베트남에서 2년 머물며 60세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나이 60세를 일컫는 '이순(耳順)'은 한자 뜻대로 풀이하면 '귀가 순해진다'가 말로,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는 나이'를 말한다. 즉,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를 일컫는 말이다. 지금 나로서는 가장 절실하게 와 닿는 말이기도 하다. 남의 말에 토를 달고 고깝게 들리고 진위를 가리려 하는 행태가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면 예순이 되기 힘들지 모른다. 선친도 이순을 넘기지 않고 먼저 다른 세상으로 가 버리셨다. 돌아가셨을 때 장남인 나는 대단히 슬피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른 길을 걸을 뿐인데 왜 그리 슬펐을까?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부터 ‘길’은 나에게 하나의 숙명처럼 다가와 가슴 속을 떠나지 않았다. 벗어날 수도, 그렇다고, 머물러 있을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길, 그 길을 걸으며 길이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생각을 품었던가?

그러나 항상 ‘길’이란 ‘이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아니 결론을 내릴 수가 없는 채 그저 길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죽으러 가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최근이다.

걸어가고 걸어가다가 머무는 곳, 그곳이 나의 마지막 지점이 되리라는 것이다. 내가 가는 길에 만난 인연들과 어떤 이야기를 하고 걷는가를 생각해보면 가끔은 한심할 때도 있다. 아쉬움 많은 인연들… 최선을 다하지 못한 만남들…

“자신의 존재를 정직하게 즐길 줄 아는 것은 절대적으로 말하자면 신적인 완성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하는데, 나는 내 삶을 정직하게 즐기며 살아왔던가?

순간순간을 너무 허비하지는 않았던가? 어렵다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쉬운 일은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탈레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을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일이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일이다.”

또 하나 가장 즐거운 일, 내가 소망한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가 험난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저마다 공부하는 영역이 다르고,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저렇게 살고, 싸우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가끔은 증오도 하지만, 인간의 삶은 일정한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은 능수능란하게 삶을 살아가지만, 일부 사람들은 항상 서툴고, 어설프고, 그래서 항상 상처와 후회가 뒤범벅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고, 지금의 이 시절도 그렇다.

풍수에서 말하는 ‘온전히 아름다운 땅이란 없다’라는 명제처럼 삶이 항상 순간 속에 결정되기 때문에 삶이 어려운 것이다.

메콩강을 따라 거닐면서 강물에게 물어봐야겠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 를.

하노이를 떠나면서 지난 2개월을 되돌아보게 된다. 새로이 만난 벗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다. 영영 만나지 말아야 할 것인가? 빙빙 먼 길을 돌아와 다시 만난 벗들이다. 노는 물도 달라지니 노는 물고기도 조금은 달라졌다.

차인표가 한 말이 있다. 주식을 할 때는 온통 주변에 주식을 하는 사람들로만 들끓더니 컴패션을 알고 기부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어느 순간 주변에 기부하는 사람들로만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조그만 행복을 나누어주었을 뿐인데 온통 행복으로만 가득 차게 되었다고 한다.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내’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노이를 떠나면서 지난 2개월을 되돌아보게 된다. 빙빙 먼 길을 돌아와 다시 만난 벗들이다. 노는 물도 달라지니 노는 물고기도 조금은 달라졌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다

사실 나는 어디 있으나 이리 홀짝 저리 홀짝 가봐야 멀리 가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사방을 볼 수 있다는 두 눈알을 아무리 굴러도 보이는 건 우물 벽뿐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우물 밖의 개구리가 되고 싶었다. 세상으로 나가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우물 안에 있으나 우물 밖에 있으나 개구리는 개구리다. 그리고 그 개구리는 그 사실을 모른 체 평생을 산다. 그리고 죽는다. 난 우물 밖의 개구리가 되고 싶었을 뿐이라고 벗들에게 강변하곤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 밖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가치과 철학을 가지고 사는 것일까? 새로운 삶을 찾아가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고독한 독수리가 있다. 수많은 새들 가운데 독수리는 최고로 강하고 빠르고 힘이 있는 새다. 독수리는 70세까지 살 수 있다. 독수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최장수할 수 있는 생체계를 그 몸에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독수리가 70세까지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년기에 접어들면서 대단히 힘든 선택을 해야 한다. 독수리가 40살이 되면 그의 길고도 유연한 발톱은 더 이상 먹이를 움켜쥘 수 없다고 한다. 날카롭던 부리도 구부러져 버린다. 오래되어 낡고 두꺼워진 깃털의 무게로 말미암아 날개는 가슴팍에 붙어버려 더 이상 날아다닐 수도 없을 만큼 힘들게 되는데 이렇게 될 때 독수리에게는 단지 두 가지 선택밖에는 없다. 그냥 죽느냐? 아니면 150일 동안이라고 하는 고통스러운 변화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 진행 과정이 일어나는 동안 그는 산꼭대기에 있는 둥지로 날아 들어가 앉아 있어야만 한다. 거기서 독수리는 바위에다 대고 부리가 다 떨어져 나갈 때까지 찍어대야 한다. 부리가 떨어져 나가고 나면 독수리는 새 부리가 다시 자라도록 기다려야 한다. 새 부리가 자라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낡은 발톱들이 빠져나가고 새 발톱들이 솟아난다. 그러는 동안 독수리의 오래되고 낡은 깃털이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 달이 지나고 나서 다시 태어난 독수리는 하늘을 비상하면서 30년을 더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우물 밖의 개구리와 고독한 독수리, 그리고 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에 정신을 팔고 무슨 생각에 몰두하는 것인가?”가 아닐까?

내가 찾는 게 ‘자유’였을까?

<그리스인 조르바>를 아무리 읽어도 난 조르바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피라에우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항구에 나가 있었을 때였다.” 이 글귀가 나에게 책을 사게 하고 ‘자유’를 갈망하게 한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Frei aber Einsam!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 살고 싶다던 브람스는 그렇게 살았다. 브람스는 그렇게 자기 멋대로 살았다. 슈만도 클라라도 제멋대로 살았다.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그런데 나에게 ‘자유 그것은 곧 고독’이었다. 중국에서의 1년, ‘자유’라는 그 영원한 화두를 가슴 안 편에 간직한 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는 회의가 있었다. 나의 삶을 지탱해 왔던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고자 했던 그 욕망은 나를 ‘자유의 포로’로 만들어 버렸다.

참다운 자유를 꿈꾸었지만 결국 자유의 포로가 되어 자유를 잃고 마는 앙드레 지드의 <배덕자>의 ‘미셸’처럼. 잔인한 소설 <배덕자>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이토록 잔인한 ‘미셸’을 내세웠다. 나도 그처럼 되는 건 아닐까? 사회적 관습과 도덕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킨 후에 찾아오는 허무함을 깨닫는 데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가야 했을까?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학창시절 읽었던 책 이름이기도 하다. 4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아직 뭐가 뭔지 모른다. 결국, 나는 ‘나의 삶’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다. 내 주변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현실에서는 항상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에 이렇게 외치는 젊은이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

"You only live once!"

 

한국 코이카 베트남 지원사업비가 20여 개 분야, 사업지원비만도 연 400억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 같은 봉사단원한테 드는 경비만 해도 20%에 달한다고 하니 우리는 엄청난 비용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YOLO!

‘인생은 한 번 뿐이다’를 뜻하는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용어로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여 소비하는 태도를 말한다. 미래 또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뭔지 모르게 ‘카르페 디엠’과는 다른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나저나 마음 가는 대로 살아야겠다. 과거를 위해 살지도 말고 미래를 위해 살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CARPE DIEM! 책도 펜도 끊고 사는 것도 괜찮았다. 새해엔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하기 전에 너무 지쳐 버리고 말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 여기 베트남에서 만나야 하지 않을까? 새로이 주어진 365날 잘 꾸며 볼 참이다.

하노이에 와서 ODA를 통한 한국 코이카 베트남 지원사업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20여 개 분야에 사업지원비만도 년 400억에 달한다고 한다. 인건비는 본부에서 나오니 별도지만 우리 같은 봉사단원한테 드는 경비만 해도 20%에 달한다고 하니 우리는 엄청난 비용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우리나라 즉, 공여국에서 사업을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정부 혹은 공산당의 요구사업 중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코이카 혹은 한국 정부에서 지원하고 싶은 분야와는 다를 수 있다. ‘라이따이한’ 문제 등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분야는 지원요청을 하지 않는다. ‘한국군 증오비’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결국 그런 분야는 NGO가 해야 할 몫이다. NGO가 필요한 이유를 찾았다. 난 사실 NGO에 대한 믿음과 효율성을 그다지 높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 와서 찾아낸 답은 GO가 NGO를 도와주는 것이다. 사실 코이카가 다른 NGO를 도와주고 있다는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나는 뭘 해야 할까? 현장지원사업 3만 불과 물품지원비 2천 5백 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협력사업을 통해 또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베트남,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현재까지 세 가지로 압축하였다.

돕는 일을 찾는 것.

증오비가 있는 마을을 찾아가는 일 그리고 일반인들도 이렇게 찾아와서 용서를 구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 그리고 우리 여행객들도 여길 찾아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일 등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리기 좋은 자료를 베트남으로 번역하는 일과 그들의 이야기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학생들과 혹은 교수들과 협력사업으로 해보는 것.

이런 것을 천천히 시작해 보고 싶다. 코이카하고는 관계가 없을지 모른다. 이제 호치민 임지로 간다. 내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이다.

2018년 12월 31일 - 하노이 랜드마크72 6층 코이카 유숙소 한 귀퉁이에서 -

글/화일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