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平 윤주석 선생 ‘백산상회서 임정 독립자금 총괄’ 서훈 추진
南平 윤주석 선생 ‘백산상회서 임정 독립자금 총괄’ 서훈 추진
  • 김시원 기자
  • 승인 2020.02.2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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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와 만주독립운동 자금의 6할이 백산상회 안희제로부터 나왔다고 밝힌바 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안희제, 맨 오른쪽(원내) 윤주석 선생(1924년)
백범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와 만주독립운동 자금의 6할이 백산상회 안희제로부터 나왔다고 밝힌바 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안희제, 맨 오른쪽(원내) 윤주석 선생(1924년)

일제강점기 중국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창구역할을 했던 남평(南平) 윤주석(尹柱石·1889∼1954·남해군 설천면) 선생의 서훈이 추진된다.

하동군과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에 따르면 윤주석 선생의 막내딸 윤덕연(81·부산시 해운대구) 전 부산 토성초등학교 교장이 제공한 선생의 유품과 김일영(83) 전 부산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가 연구 분석한 ‘남평 윤주석 선생 유고집’(고려대 부산교우회 2009년) 자료에서 선생의 항일운동 행적을 확인했다.

자료에 의하면 윤주석 선생은 1915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상과를 졸업 후 1916년 백산상회 서기로 들어가 백산 안희제와 호형호제하며 1920년 8월까지 동지적 결합으로 무보수로 일하며 자금과 조직 관리를 총괄하며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비밀리에 전달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와 만주독립운동 자금의 6할이 백산상회 안희제로부터 나왔다고 밝힌바 있다.

윤주석 선생은 안희제의 뜻에 따라 1920년대 경남은행 하동지점에서 7년간 근무하며 어음 할인을 통한 독립자금 송금을 맡았다.

그리고 하동에서 ‘섬강한시회(蟾江漢詩會)’를 주관, 안희제(의령 출신·건국훈장), 방정환(아동문학가·건국포장), 이승훈(전 동아일보 사장·건국훈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근 진주·사천·남해ㅍ광양·구례지역 유력인사들과 교류하며 시국을 논하고 독립자금 모집과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聯通制) 구축도 힘썼다.

연통제는 국내·외 업무 연락을 위한 지하 비밀 행정조직으로 국내에서는 도, 군, 면 단위로 조직했다.

더불어 윤주석 선생은 1919년 11월 부산에서 안희제 주도로 결성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 설립의 실무를 도맡아 추진했다.

기미육영회는 가난한 청년 인재에게 외국 유학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장학회로 안호상(초대 문교부 장관)·이극로(일제강점기 한글학자)를 독일에, 신성모(제2대 국방부 장관·건국훈장)를 영국에 유학 보내는데 윤주석이 일경의 감시를 따돌리고 배편을 마련하는 등 행동요원 역할을 했다.

선생의 유품 중에는 하동 한시회에 참석했던 백산 안희제가 지은 시 1편과 소파 방정환이 지은 시 1편, 남강 이승훈(기미독립선언서 서명 33인중 1인)의 시 3편을 비롯해 한시 64편(광복 전 44편, 광복 후 20편)과 선생이 지은 노래, 타령 16편이 있다.

◇ 백범 김구·엄항섭 등과 활동…하동고 건립과 인재 양성에 헌신

윤주석은 해방을 맞이하자 엄항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겸 선전부장·건국훈장)과 함께 백범 김구를 수행하며 하동 순회강연에 참석,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지지했다.

이후 1947년 교육입국의 길로 나선 선생은 하동중학교 설립 기성회 사무국장, 하동향교 장의(掌議), 1949년 고향주민들의 부름을 받고 남해군 설천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953년 하동지역민과 유지들의 영입을 받아들여 하동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선생은 부족한 교실난을 해소하기 위해 통영어업조합(수협)의 목조건물을 헐어 이송 신축, 인재양성을 하던 중 1954년 3월 6일 과로로 병을 얻어 순직했다. 향년 65세였다.

하동군민과 유지들은 학교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삶의 모든 것을 조국 광복과 교육에 바친 그의 마지막 길에 슬퍼하지 않은 군민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묘소는 그의 고향마을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 노량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있다.

윤주석 선생의 막내딸 윤덕연 교장은 “아버지께서는 업적에 있어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셨다”며 “공(功)을 멀리한 삶에 오히려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3·1운동 100년과 임시정부수립 100년의 세월이 흘렀고 부친의 의로운 행적이 잊히는 것이 안타까워 하동군이 추진하는 독립운동가 발굴과 재조명에 함께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윤상기 군수는 “독립운동과 인재양성을 위해 일신을 바친 윤주석 선생의 숭고한 뜻이 계승 될 수 있도록 하동군민과 노력하겠다. 또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과 함께 정부서훈을 시급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시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