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예유근의 기억의 더께] 나는 어쩌다 화가가 되었을까 2
[서양화가 예유근의 기억의 더께] 나는 어쩌다 화가가 되었을까 2
  • 예유근
  • 승인 2020.03.0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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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 경 선자 누나, 이종사촌 옥수 누나와 함께. 사진=예유근 제공.

기억의 더께 둘

집에는 일가친척들이 항상 많이 기거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나중 거의 결혼까지 도와 분가를 시켰다. 당시 이종사촌 누나들이 엄마 일을 도우며 나를 많이 돌보았다. 가끔은 친누나가 엄마를 대신해 나를 키웠는데, 나는 자다가 누나 젖을 만지다 좀 다른 것 같아 깨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늘 나와 자주 그림을 그리던 엄마 같은 누님의 죽음은 상사병이라 했다. 사실 아직도 난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나 보던, 상사병으로 정말 죽는 사람이 있는지는 믿지 못하겠다. 누나의 가슴 아픈 사연은 사실 난 잘 모른다. 병원에서는 병명도 모르고, 아픈 원인도 몰랐다. 어머니는 두 세 차례 무당을 불러 굿도 해보곤 했지만, 22세 꽃다운 나이에 교사발령장을 안고 힘들게 아파하다 돌아가셨다. 나는 태어나 그렇게 큰 소리로 목 놓아 엉엉하며 많이 울어 본 기억은 별로 없다. 하루 종일 울었다. 다음 날도 또 울었다. 한 삼일 정도는 어머님과 같이 미치도록 울었던 것 같다. 후에 일찍 죽은 총각과 영혼결혼식을 올리고 맺어 주었다.

그림 그리는 일도 많이 없어졌다. 나는 국민(초등)학교 4학년 정도까지도 엄마 젖을 만지며 컸다.

봄이 되면 영도에서 전차를 타고 동래 온천장까지 우리 동네 엄마들이 온천 겸 꽃놀이를 나섰다. 금강원 식물원까지도 어머님은 나를 데리고 나섰는데 정말 재미도 없고 부끄러워 다니기가 싫었다. 특히 장구를 메고 앞장서 나선 어머님이 부끄러웠다. 어머니가 장구를 치면서 선창을 하면, 진달래를 함박 꺾어 온몸에 꽃 치장을 한 동네 엄마들이(아마도 '밀양아리랑' '쾌지나 칭칭나네' 비슷한 노래들이었던 것 같다) "시냇가에는 자갈도 많다. 이내 가슴엔 사연도 많다~"고 합창으로 따라 부르면서 어머니 뒤를 따라 다녔다. 나는 멀리 뒤 따라 가면서 왜 우리 엄마는 저리도 신명나게 즐거워하며 노래를 잘 할까, 생각했다.

국민학교 다닐 때는 나의 붓글씨나 그림이 교실 뒤 게시판에 늘 붙어 있었다. 해마다 담임선생님이 미술실기대회가 있으면 주로 나를 추천 또는 참가시켰으며, 가끔은 담임이 직접 인솔해 데리고 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각종 미술대회 이름도 다양한 습자(서예), 점토, 유토, 공작, 도안, 크레용, 미술 등이었다. 돌이켜 보니 학년마다 가정방문을 온 담임 선생님께 나 몰래 잘 부탁 말씀을 드린 어머님의 교육에 대한 지극한 숨은 자식사랑이 있었던 듯 하다.

초량국민학교 점토실기대회를 마치고 오는 길에서 그 동네 아이들에게 자기 동네를 허락 없이 지나간다고 잡혀 돈을 다 뺏기고 집까지 걸어 간 기억이 선하다. 동네마다 지나다닐 때면 깡패처럼 왜 그리도 텃세를 많이 부리던지. 각종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상을 받았고 (아마도 참가만 해도 독려 차 거의 입상권에 넣어 줬겠지) 학교 운동장 전체 조회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시상식을 종종 가졌다. 바보처럼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무엇이든지 만들고 하는 게 아주 재미가 좋았다. 눈에 보이는 건 막 그려 대었다. 동네 만화방 출입과 영화는 형님들 따라 다니고 학교 단체 영화 관람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유년기 기억 중 하나는, 위로 형과 터울이 많은 막내인 나를 떼어놓기가 마음이 아프셨는지 당신께서 외출하실 땐 자주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때는 궁금하고 신기한 것이 많았지만 특히 혼자 사시는 어머니 주변에는 왜 남자 친구들이 많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혼자 사는 여자에게 남자들이 접근하는 건 당연지사지만 나는 늘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어른들끼리 대화 중에 내가 들으면 곤란한 내용은 일본말로 하곤 했다. 당시 식민지교육을 받았던 어른들끼리 종종 보이는 모습이었다. 대화 내용이 궁금하여 관심 없는 척하며 어떤 내용인지 귀 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사실 정확한 뜻도, 내용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히야까시' 같은 말을 눈치로 혼자 마음대로 해석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일본어는 살짝 살짝 들리곤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교직에 근무할 때 동료 교사들이 퇴근 후 자주 가는 학교 밑 단골 외상 술집에서 일부 원로 선배 교사들끼리 따로 한 잔 하면서 가끔 엔까(えんか, 演歌: 메이지시대에서 쇼와시대 초기에 걸쳐 거리에서 불렸던 애조 띤 일본 가요-편집자주)를 즐겁게 합창으로 불렀다. 친일 느낌도 나고, 불쾌하고, 꼴 보기 싫어 화를 내며 술잔을 집어 던진 기억도 있다. 나만 그런가? 아쉽게도 부산 사람 말 표현 중에 일본어가 종종 섞여있다. 노동판이나 미술용어 외에도 일본어 잔재가 많이 들려 고치면 좋겠다. 헉! 그런데 지금은 일본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노래방 가면 일본 노래를 곧잘 부르곤 한다. 뭐지? 선린의 예술교류라 생각해야지~ㅎㅎ

국민학교 6학년 7반 때 내 인생 최고의 치욕적인 사건 한 개는 잊을 수가 없다. 수업 중 떠든 벌로 우리 반 친구 대여섯 명과 발가벗고 운동장 한 바퀴를 돌고 다시 교실로 들어올 때 옆 8반 창문 너머 여학생들의 환호소리는 지금도 생생하다. 어떻게? 그나마 혼자가 아니어서 훨씬 덜 부끄러웠다.

글/서양화가 예유근

1954년생 

전시

-개인전 9회(서울, 부산)

-단체전 및 국제전

1981 부산미술대전 대상(부산시장상) / 2019 아시아호텔 아트페어(파라다이스호텔/부산) 외 약 470여회 국내외전 출품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부산시립미술관, 그랜드호텔, 동방호텔, 지오 플레이스, 온종합병원 외 다수

학력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졸 /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졸

경력

부산미술협회부 이사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부산미술대전 심사위원, 부산현대작가회 회장, 브니엘예고 예술교감,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외 6개 대학 강사 역임 등

현) 부산미술인촌 추진위원장, 부산비엔나레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