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권씩] "텅빈 시간들에 대한 고발" 이광수 '무정'
[한 달에 한 권씩] "텅빈 시간들에 대한 고발" 이광수 '무정'
  • 자율바람
  • 승인 2020.02.12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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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무정'. 사진=민음사 제공.
이광수의 '무정'. 사진=민음사 제공.

사실 알고 보면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은 무정하다. 모두가 나름 '컨셉'을 잡고 산다지만 돌아서서 생각해 보면 모두가 하나 같이 무정한 것들 뿐이다. 누구든 과거의 실패 경험을 생각할 때면 얼른 떠오르는 것이 세상의 무정함이다. 세상을 오래 살수록 세상의 무상과 무정은 더욱 분명해진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떠나간 연인을 생각하면 그것보다 무정한 것이 없다. 어디 그뿐이랴. 시대의 도도함, 세파의 모짐, 인생의 가련함 등은 결국 무정의 다른 말일 것이다.

1917년부터 매일신보에 연재를 시작한 <무정>은 그 시대 무정한 것들에 관해 쓴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시대의 미몽과 한계에 가로막힌 사람들로 묘사된다. 이들은 각자의 꿈과 희망 위에 존재한다고 믿지만, 사실 그들은 그 참된 의미를 위해 고뇌하지 않는다. 다만 텅빈 시간으로 삶을 흘려보낼 뿐이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그런 텅빈 시간들에 대한 고발이다. 물론 이 소설이 희망하는 바는 텅빈 시간이 아닌 참된 시간이다. 소설은 마지막 부분으로 접어들면서 하나의 반전을 모색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나름의 참된 시간을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경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이형식은 일본 유학까지 갔다온 전도유망한 25세 청년이다. 사건의 발단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형식이 김 장로의 딸 김선형을 위해 영어과외를 시작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릴 적 형식에게 숙식과 교육까지 제공해 은인이라 여기던 박 진사의 딸 박영채가 형식을 찾아와 7년 만에 상봉한 일이다. 

과외 수업을 위해 박 진사 댁을 방문한 첫 날, 형식은 김선형을 보고 첫 눈에 반한다. 그녀의 단아한 외모와 우아한 자태는 고아 출신으로 세파에 시달려 어렵게 자라온 형식에게는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선형을 처음 본 그 날, 영채가 형식이 기거하던 곳으로 찾아온다. 영채는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뒤 결국 기생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형식이 자신을 구원할 평생의 배필임을 믿고 정절을 지키고 있었다. 이는 영채가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여성에 대한 구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채는 형식을 만나 눈물로 자신의 지난 과거를 털어놓게 되고, 형식도 영채를 자신의 배필로 맞을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결정적 사건이 일어난다. 경성학교의 주인인 김 남작의 아들 김현수와 경성학교 학감으로 있던 배명식이 영채를 흠모해 그녀를 청량사에 납치한 후 겁탈하려는 계획을 실행했던 것이다. 물론 형식은 친구인 신우선의 도움으로 겁탈 직전 박영채를 구출하긴 하지만 영채는 이미 자신의 입술이 김현수에게 더럽혀진 이상 정절을 잃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영채는 형식에게 편지 한 장을 남겨두고 사라지게 된다. 편지에는 자신의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대동강 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겠다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깜짝 놀란 형식은 그 길로 평양으로 가지만 영채의 소식은 듣지 못한 채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다. 

형식이 경성에 돌아와 영채에 대한 자신의 무정함을 깨닫고 자책하던 중 김 목사라는 사람이 찾아온다. 김 목사는 김 장로가 자신의 딸 선형을 형식과 혼인시키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아울러 혼인이 성사될 시엔 김 장로가 자신의 딸과 사위를 모두 미국에 유학보내줄 수 있다는 말도 전한다. 형식은 고민 끝에 선형과 결혼을 약속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한편 영채는 자결을 결심하고 평양으로 가던 기차에서 김병욱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일본 유학생으로 방학 중 평양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기차에서 영채의 자결 결심을 들은 병욱은 영채가 금과옥조로 믿고 있던 정절 관념의 허상을 비판하고 자살의 무용성을 설득한다. 영채는 병욱의 신사상에 깨달음을 얻고 자살 결심을 포기한다. 그 후 영채는 병욱의 집에 몇 달간 머물면서 병욱의 신사상에 더욱 동화되고, 결국 음악을 배우러 병욱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영채는 유학을 위해 부산행 기차를 타고 가던 중 미국 유학을 가던 형식이 같은 기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제야 영채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안 형식은 심한 마음의 갈등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던 중 기차는 홍수로 막힌 철길 때문에 하루를 멎게 된다. 수재민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형식, 선형, 영채, 병욱은 조선의 실상을 새삼 자각하고, 조선의 미래를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넷은 그들이 계획한대로 미국과 일본 유학을 떠난다.

책을 다 읽어갈 때쯤 '무정'의 뜻이 비교적 선명해졌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무정'이었다. 소설이 나온 1917년의 사람들은 문명개화를 원하고 있었고, 중국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만국공법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근대화의 시대였다. 근대의 상징인 기차 위에서 영채는 옛 정절 관념에서 벗어나게 되고, 영문식 관념을 지닌 형식은 한문식 관념을 비판하면서 고뇌하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들 모두가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은 미국, 일본으로 유학을 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형식이나 병욱이 지향했던 그 시대의 논리는 1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그것은 아마도 낡고 어두운 구세계로부터 밝고 희망찬 신세계로의 비약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00년 후 우리는 100년 전 이형식, 박영채, 김선형, 김병욱과는 비약적으로 다른 시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비약을 가능케 한 '비약을 향한 열망'만큼은 100년 전 그들과 우리가 다르다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정>의 '그들'은 우리들의 100년 전 흔적이자, 자화상으로 간주되어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것이 <무정>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일 것이다.

글/자율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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