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리뷰] 음표로 집필한 사회학 소설, 9와 숫자들 '서울시 여러분'
[음반리뷰] 음표로 집필한 사회학 소설, 9와 숫자들 '서울시 여러분'
  • 김성대
  • 승인 2019.12.0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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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살았었다. "말은 제주, 사람은 서울"이라는 헛소리를 진리라 믿고 살아온 나 또한 그 '성공의 땅'으로 갔었다. 높은 빌딩, 너른 도로, 넘쳐나는 사람들. 지하철에서 짜증나는 부대낌조차 그땐 성공을 위해 응당 겪어야 하는 관문같은 것인 줄 알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마냥, 겉으론 모든 것이 화려하게만 보였던 서울은 그러나 직접 살아본 바론 고독하고 삭막한 이기의 도시였다. 인구도 많고 문화도 많아 교양도 정(情)도 함께 많을 것 같은데 막상 지내본 서울이란 동네는 왠지 사람이 사람처럼 살기엔 쉽지 않아 보였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그곳은 신해철의 노래 가사처럼 "다 함께 있지만 외로운 사람들"의 아지트처럼 느껴졌다. 신으로 군림하는 돈과 한줌의 명예가 그 막연한 숨막힘, 구체적인 쓸쓸함을 다 감싸줄 순 없을 것 같았다. 나에게 서울은 그런 곳이었다. 나도 없고 너도 없어 덧없는, 그런 섬 같은 곳. 서울이었다.

9와 숫자들이 자신들의 네 번째 작품에 바로 그 서울을 끌어왔다. 더 정확히는 '서울시'에 살고 있는 '여러분'이다. 만연한 불평등과 일상 속 방치된 위협, 억눌린 분노, 불투명한 미래와 불공평한 기회 앞에서 느끼는 절망 또는 허무, 편중된 부와 그로 인한 박탈감, 공동체 분화에 비례해 뒷걸음질 치는 문화와 제도, 언젠가부터 다수의 정서를 좀먹고 있는 뿌리깊은 고독. 그 속에 갇힌 '여러분'. 밴드를 이끄는 9(송재경)는 그런 "작거나 적거나 약하거나 가난하거나 달라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많은 이들"에게 "조건 없는 응원과 위로"를 보내기 위해 윤항기가 쓰고 윤복희가 부른 '여러분'을 염두에 두고 이 앨범을 구상했다. '여러분'은 "앨범의 핵심이자 결론"으로서 리메이크 되어 앨범 끝에 자리했다.

그렇게 앨범 [서울시 여러분]은 1,000만 인구에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기형 도시에서 스스로와 주위를 함께 잃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밴드는 이것을 음악과 글(소설), 공연으로 풀어낼 심산이었는데 이 작품은 거기에서 음악과 글에 해당한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의 처지를 "한 평 반의 철옹성,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 자리"로 표현하고('물고기 자리')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빚으로 빚은 빛, 밑으로 쌓은 위"라는 사실을 통찰하는 것('서울시')에서 알 수 있듯 송재경이 진심을 담아 꾹꾹 눌러쓴 글은 그야말로 시인의 무엇을 담지한 강력한 수사들로 무장해 있다. 혹자는 이 풍경을 두고 "21세기의 시인은 목소리와 마이크를 준비한다"고 말했다.

앨범은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로 젖어드는 서곡 '서울시'로 문을 연다. 이 잔잔한 서곡은 2019년 10월 기준 인구 973만 6,289명의, 세계에서 네 번째로 부유하고 다섯 번째로 높은 도시(2018년 GDP 세계 4위, 초고층 5위 빌딩 보유)인 서울이 과연 정말로 부유하고 높은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살고 있는 터를 응시하며 감행하는 아픈 자각. 이는 송재경과 그의 동료들이 앨범 전반에 걸쳐 깊숙이 후벼파는 사회풍자와 비판의 시선을 가져갈 것이라는 포근한 암시와 같다.

먼저 가사다. 이 앨범은 음악도 음악이지만 가사에 더 귀가 간다. 9와 숫자들에게 음악과 가사는 늘 동전의 양면이었다. 창작의 모토를 '음악만큼 가사도'나 '음악보다 가사를'에 둔 벨 앤 세바스찬과 스미스(The Smiths)가 이번 작품에서 레퍼런스로 쓰인 건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가사들엔 익명의 A씨들이 반복해 나온다. 같은 A씨이면서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진 A씨들을 송재경은 소설적 설정을 통해 조목조목 묘사해나간다. 그 안엔 태초 언어에 얽힌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5개국어 구사자 A씨가 있고('She's International), 가정이라는 미명 아래 주부라는 오명을 입고 살아온 A씨도 있다. 특히 취미인 가요(sing)로 저 멀리 가요(escape)를 부르짖는 주부 A씨는 "주부가 무슨 전기밥솥, 식기세척기냐"며 자신을 얽어맨 몹쓸 현실을 북북 찢어 서울시민들(또는 서울서민들) 가슴 한켠에 있던 울분을 대리 해소시킨다.

송재경이 기획하고 멤버들이 거든 이 아슬아슬하고 불편한 생활의 발견은 몇 달 간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고 누구와도 만난 적이 없는데다 물 외엔 무엇도 먹지 않은 작가 A씨('24L')의 초췌한 일상과 반복적 무뎌짐 속에서 십 수 년을 보내다 마흔을 넘겨 늦은 방황기를 맞는 A씨('I.DUB.U')의 사연을 지나 "나날이 낯설어져가는 거울 속의 나"를 마주하는 이 땅의 모든 '그녀'들에게 바치는 '그녀의 아침'에 이르러 비로소 절정을 맞는다. 자칫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을 이 다양한 캐릭터와 상황 설정은 그 설정이 설정에 그치지 않고 (서울)사람들의 현실을 실감나게, 그리고 냉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음반 전체 플롯을 지탱하는 핵심축이 된다.

이런 가사들 속엔 또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A씨들 외 그들 곁을 지키는 'B씨'들도 나온다. B씨들은 히트 아이템을 선보인들 결국 남의 배만 불리고 자신들은 10년이 지나도 빈털털이 신세를 면치 못했거나('지중해'), 계획에 없던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10살이 다 되도록 가족끼리 단란한 시간 한 번 못 보내고 전쟁만 치렀다.('고학년') 평생 사진관을 운영해오다 디지털 카메라에 밀려 경영난을 겪던 끝에 자식 결혼자금과 자신들 노후자금을 마련하려 살던 집을 처분하려는 B씨 역시도('Silver Horse') 다른 B씨들처럼 A씨 곁을 힘겹게, 하지만 든든히 지켜온 사람이다. 모든 것이 강요된 희생, 일상적 차별, 부당한 대우, 이념의 무자비 아래서 신음해온 이들의 이야기다. 물론 그 줄거리로부턴 당신도 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 송재경과 숫자들은 결국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 모두의 일상적 비극을 자신들 신보의 콘셉트로 삼은 셈이다.

그렇다면 음악은 어떤가. 음악은 가사의 배경에 머물고 있는가. 아니다. 9와 숫자들 4집에서 음악은 이 산뜻한 스토리텔링이 발 디딜 수 있는 확고한 기반으로서 음악이다. 가령 'She's International'과 '24L'에 응축된 록의 기운과 '물고기 자리'에서 감행한 대담한 편곡은 밴드가 그동안 쌓아온 음악적 성장의 일면이다. 송재경이 자신의 솔로 앨범을 위해 4년 전부터 관심 가져온 레너드 코언을 오마주한 'Silver House'의 세련된 푸념 역시 밴드의 성숙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긴 마찬가지다. 그렇게 앨범은 '눈물바람'의 서러움을 덜어낸 자리에 '엘리스의 섬 (Song For Tuvalu)'과 '커튼콜'의 정서를 심어 메시지, 멜로디, 그루브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모두를 보듬어 흘러간다. 기타팝의 상큼발랄함, 모던록의 에너지, 단정한 디스코 비트의 열기가 서울에서 문드러져 가는 사람들의 무채색 피로에 활력으로 채색되는 것이다.

송재경은 2013년 싱글 ‘높은마음’을 기획하던 때부터 이런 콘셉트 앨범을 염두에 두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고, 밴드의 말을 빌리면 이번 작품은 누구든 한 부분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긴, 누구나 한 곡 정도는 좋아할 만한 앨범으로서 세상에 남게 됐다. 그 안엔 또한 톤과 연주, 편곡 차원에서 지금의 구숫이 들려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음악적 스펙트럼이 담겨 있다. 발매하는 앨범 숫자에 비례해 발전하고, 내는 앨범마다 수작으로 직행하는 밴드는 드물다. 2010년대 한국 인디음악의 종착역인 9와 숫자들(의 리더 송재경)은 그 드문 일을 타고난 재능과 탁월한 성실함으로 느리게 이뤄가고 있다. "서럽게 울던 시간 속의 여러분"을 위해 음표로 집필한 '사회학 소설'쯤으로 회자될 그들의 네 번째 앨범. 2019년 한국 대중음악계도 이렇게 저문다. 

글/김성대 (본지 편집장·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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