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 영화사] 경남 최초 영화감독, 강호의 작품들
[경남지역 영화사] 경남 최초 영화감독, 강호의 작품들
  • 이성철
  • 승인 2019.11.0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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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부터 귀국한 강호는 1927년 이경손, 김을한, 안종화, 김영팔, 한창섭 등이 창립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이하 카프로 약칭) 소속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영화 공부와 작품 활동에 나서게 된다. 이때 같이 참여한 사람들은 이종명, 윤기정, 임화, 김유영, 서광제 등이었다. 그의 영화 문법 공부에 큰 영향을 끼친 이 중의 한 사람은 나운규였다. 즉 나운규로부터 영화와 관련된 기본적인 용어뿐만 아니라 ‘대비 수법’, ‘반복 수법’, 그리고 ‘격동 수법’ 등으로 부르는 연출기법에 대해서도 배웠다고 한다. 카프 영화부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총 5편이었는데(<유랑>, <혼가>, <암로>, <화륜>, <지하촌>)>, 이 중 두 편(<암로>(1928), <지하촌(1931))을 강호 감독이 연출하였다(나머지 세 작품은 김유영 감독). 이러한 점들을 비추어볼 때 그는 경남 최초의 영화감독이기도 하지만 카프 영화사에서도 중심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 작품들에 대한 소개가 사실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먼저 이장열은 강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는 세 편이었다고 말한다. 즉 1928년 조선영화예술협회 소속으로 <지지마라 순이야>를 연출하였다고 한다(남돈우(1992) 역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나아가 이 영화의 제작자, 기획자, 촬영, 편집을 도맡았고, 그리고 임화, 서광제, 조경희 등과 함께 배우로 출연까지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강호를 설명한 선행연구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다. 그리고 강호 자신이 쓴 “라운규와 그의 예술”이라는, 즉 그의 영화활동 이력도 비교적 많이 담겨있는 평론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강옥희 등에 따르면 이 영화에 서광제가 출연한 것은 부분적으로 확인되지만 강호의 출연사실은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1940년 5월 1일에 발행된 <삼천리> 제12권 5호에 실린 지난 ‘20년간 작품제작 연대기’라는 자료를 보면, <지지마라 순이야>는 소화 5년(1930년) 태양 키네마 제작, 감독 김태진, 촬영 加等恭平, 출연 김옥두, 김정숙, 주삼손, 이규설 등으로 기록되어있다. 작품도 미완이었다고 한다.

둘째, 그가 1928년에 연출한 <암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이 영화는 1920년대 말 장기간의 농업공황으로 황폐화된 조선의 농촌과 농민들의 실상을 그려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의 남향키네마에서 제작한 이 영화에 대해 이장열은 이 영화의 원래 시나리오 제목은 <쫓겨가는 무리>였는데 촬영 도중 <암로>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촬영, 감독, 제작, 배우의 1인 4역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한 바처럼 이 영화의 촬영과 편집은 민우양이었다. <암로>의 제작비 중 상당 부분은 강호 감독의 고향이었던 진전면 오서리의 권씨 문중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는 권환의 지원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김연실(연도 미상). 출처=안종화.

참고로 <암로> 제작과 관련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먼저 웹상의 자료에 나타난(http://blog.daum.net/dorbange/13), 강호 감독을 외할아버지라 부르는 문공 또는 유리광이라는 분의 회고이다. 이에 따르면 영화 <암로>의 주제곡이었던 ‘암로’는 “꽤 인기가 많아서 어릴 때 더러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마지막 가사는 정확히 기억합니다. ‘내 어린 넋을 당신께 바치려 합니다’ … 외갓집 동네 초등학교 봄 가을 운동회에선 다른 곳에서는 들어보지 못하는 응원가가 흘러나오더군요. 당시 옆에 있던 아재(?) 뻘 되는 분이 ‘저거 니 외할배가 지었다 아이가’ 그러더군요.” 마지막 가사에 대한 그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영화 <암로>의 주제곡(사실 무성영화이기 때문에 주제곡이라는 표현과 함께 가창이라고도 한다)은 강석연, 김연실 등이 불렀다. 김연실은 영화 및 연극배우이자 가수이기도 했다. 그녀의 오빠는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학근이었으며,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인 <잘 있거라>(1927)에도 출연하였다.

이후 이 노래는 고복수 등의 가수에 의해 리바이벌 되었다. 고복수의 암로에는 ‘사랑가’, 그리고 김연실의 그것에는 ‘어둔 길’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2014년 12월 9일 현재 동영상 삭제 상태). 아래에 소개되는 가사는 1930년 김연실의 노래가사이지만 고복수가 부르는 노래 가사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가사에 대한 문공의 기억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노래의 작사 작곡가는 김서정이다(중앙대 전신 중앙보육학교 출신). 고복수의 노래는 유투브에서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강호가 직접 쓴 “라운규와 그의 예술”에 따르면 강호는 김연실을 자신의 영화 <암로>에 출연시키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듯하다. 즉 강호는 나운규의 영화 <잘 있거라>의 촬영장에서 김연실을 처음 보게 되는데, 후일 <암로> 출연 부탁으로 그녀의 집을 방문까지 하였으나, 그녀가 이미 먼저 다른 영화에 출연 약속이 잡혀있어 허락을 얻지 못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암로>에 김연실을 발탁하지 못한 강호 감독은 이경손의 소개로 박경옥이라는 배우를 기용하게 된다. 이경손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인물이었다. 여담이지만 김연실의 연기에 대한 심훈(1931)의 평은 가혹하다. 즉 “(그녀는) 이렇다 할만한 독특한 장기가 없다.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설 뿐, 곡선, 더구나 각선미가 없는 것은 모던 껄로서는 아까운 일이다.”

고복수: 암로(사랑가)

1절

숲 사이 시냇물 흐르는데

한가한 물레방아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 이 몸은 자랐네

(후렴)

내 사랑아 이 어린 몸 이 어린 나를

부드러운 그 품안에 껴안아주세요

2절

은은한 달 아래 산보할 때

따뜻한 그의 손길

앵두같은 그 입술이 내 눈에 그렸네

3절

십오야 달 밝은 저 달 아래

쌍쌍이 노는 물새

아름다운 그 노래 속에 이 몸은 자랐네.

셋째, 강호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지하촌>(1931)과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보도록 한다(참고로 <지하촌>의 원래 시나리오 제목은 <늘어가는 무리>였고, 시나리오는 안석영과 함께 썼다. 안종화는 <지하촌>이 김유영의 작품인 것으로 밝히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기억이다. 강호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1930년 카프는 ‘청복키노’를 조직하여 <지하촌>을 제작한다. 출연진은 아래에 소개되는 윤기정의 비평문에 자세히 소개되어있다. 그러나 윤기정의 글에는 이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임화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이장열에 의하면, 극중 주인공의 이름을 ‘김철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림철진’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일본군의 후원을 받는 함남철공장의 자본가인 김기택은 한편으로는 경제공황의 위기를 막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대륙침략에 발맞추어 군수공업을 확장한다는 명분으로 민중들의 삶터인 빈민촌을 철거시키고 공장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한다. 이에 빈민촌 사람들과 림철근을 비롯한 함남철공장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에 돌입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1924년의 경우 철공장 노동자들의 하루 수입은 70-80전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맥주 두 병값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이 영화의 촬영은 영하 30도의 혹한 중에 진행되었고, 촬영도중 세 차례나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타격은 영화 제작비를 마련해 준 출자주가 일제 경찰의 위협과 공갈로 인한 공포감 때문에 영화제작에서 손을 뗀 것이었다고 한다. 한편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강호 감독을 자신의 외할아버지라고 밝힌 문공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는 전제를 달고 있지만 “(<지하촌>은) 서울에서 한 달인가? 인기리에 상영하다가 대구에서 압수당한 걸로 압니다. 그리고 그 일로 옥고도 치루시고…”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1940년 5월 1일 발행된 삼천리(제12권 제5호) 잡지의 ‘20년간 작품제작 연대기’에 따르면 카프의 청복키네마에서 제작한 <지하촌>은 미완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강호 감독이 대구에서 옥고를 치룬 사건은 1938년에 있었던 공산주의협회자사건(일명 왜관농민야학사건, 1938년)이었음을 감안하면 <지하촌> 제작과는 거리가 있는 회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영화인들의 증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심훈의 경우, “<지하촌>을 감독한 강호씨 등이 있으나 첫 작품이 완성되지 못하였으니 후일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촌평을 하고 있는데, 그는 아예 <암로>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거나, <지하촌>이 강호의 첫 작품인 것으로 생각하였고, 이 작품은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심훈은 민우양이 <지하촌>을 촬영하였으나 이 작품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고 재차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강호 자신이 이 영화는 일제 경찰의 검열에 통과되지 못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반면 강호 감독의 첫 연출작인 <암로>는 당시의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는 역설적인(?)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극장에서 상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예컨대 안종화는 <암로>는 1928년 단성사에서 상영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참고로 이 당시에는 영화의 개봉을 봉절(封切)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손위무는 “강호, 민우양 등이 남향키네마를 조직하여 <암로>를 발표하였으나(강조 필자) 모두가 초지(初志)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 되고 말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당대의 비평가였던 윤기정은 <암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원래 이 비평은 1929년 「조선지광」 3월호에 실린 것이다). 인상비평이 아닌 거의 유일한 전문적인 비평문이기 때문에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하촌>의 스틸과 출연 배우들. 안종화는 오른쪽 스틸을 <지하촌>, 이효인은 <화륜>의 것으로 밝히고 있다. 출처=이효인, 안종화.

“이 영화의 원작은 강윤희(강호 감독의 본명-필자 주)군의 것인데 원작으로 대단히 실패했다. 다만 취할 것이라고는 물레방아간이 정미소로 변하여 봉건시대의 생활이 날로 몰락되어 간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이것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면 다소 원작의 골자를 찾았을 것을 너무나 ‘사랑! 사랑!’하고 애욕에만 기울어졌다. (그리고: 필자 주) 각색에 있어서 전혀 실패하였다. 각색이 혼란하고 전체가 어근버근해서 관중으로 하여금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다. 한 씬에서 다음 씬으로 옮겨가는데 전혀 연락이 닿지 않은 곳이 많다. 감독의 수완이 이 작품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앞으로 많은 연구가 없어가지고는 다시 감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영화에 있어서 감독의 책임도 있지만은 출연자로서 성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찾을 수 없다. 그 중에도 ‘니마이매’격인 강장희군은 표정이 전혀 어색해서 이 영화를 영화로서 살리지 못한데 중대한 책임이 없지 않다. 강호, 박경옥, 차남곤 세 분에 있어서도 이러타 할 만한 연기를 발견할 수 없다. 오직 이명래군만이 다소 어색한 곳이 있으면서도 간간이 연기에 수긍할 점이 있다. 이군의 체격과 인물이 상당한 감독만 만나면 반드시 출연자로서 앞으로 성공할 날이 있을 줄 믿는다. <암로> 한편에서 취할 것이 있다면 오로지 자막과 촬영뿐이다. 자막의 내용을 말하는 것은 물론이다. 촬영기사의 공적이 아니면 이 영화를 전혀 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민우양군으로 말하면 이번이 처녀촬영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효과, 그만한 성공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앞날의 큰 기대를 아니 할 수 없다. 조선영화계를 위하여 앞으로 많은 노력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 우리들의 큰 기대를 저버리지 말 것이다.”

한편 강호는 <암로>가 제작될 당시 나운규에게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 알려주고 그로부터 조언을 듣는다. 강호는 나운규가 자신의 영화 내용이 지닐 수 있는 결함들을 친절하게 지적해주었다고 회고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화는 갈등이 명확해야 합니다(…) 온갖 갈등 가운데서 우리는 가장 주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탐구해야 하며 그래서 하나의 집약된 덩어리를 구성해야 하고 그 덩어리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기타의 모든 갈등을 끌고 가야합니다. 만일 갈등의 주되는 덩어리가 뚜렷하게 설정되지 못한다면 극적 구성이 약해지고 사건의 발전이 애매해지며 따라서 영화를 볼 맛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생활을 깊이 아는 데 있습니다(…) 오늘 이 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갈등은 조선 사람들이 이 몸서리치는 압박과 빈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생활의 모든 갈등이 여기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자료들은 강호 감독의 첫 번째 작품인 <암로>가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상영되었음을 반증하는 자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들의 필름들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강호 감독이 1932년 <도화선>이라는 작품 창작 중 카프 사건으로 일제에 검거되는 탓에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없었다는 주장도 역시 확인 할 자료가 없다. <지하촌>의 경우 스틸 사진이 남아있다.

글 / 이성철 창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기획 연재 ‘경남지역 영화사’는 책 <경남지역 영화사: 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의 저자 이성철 교수와 출판사 호밀밭의 허락 아래 미디어팜에 게재되는 콘텐츠입니다.